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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도 섬앤산

돌산도 대율항 방파제를 걷는 김지윤·권지혜씨. 섬 동쪽 해안선을 이은 여수 갯가길은 걷기길치곤 까다로운 편이지만 다양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글 신준범 차장대우 / 사진 주민욱 기자

동백꽃 떨어지는 0.1초, 목숨 건 사랑의 아름다움

돌산도 금오산과 봉황산 10km 산행 그리고 여수 갯가길

‘사랑을 믿나요?’

동백은 늘 이런 식이다. 칼바람 성성한데, 홀로 낭만에 취해 있다. 작은 송이 안에 깃든 붉은 궤적은 한번 말려들면 돌이킬 수 없다. 투명한 물속에 떨어진 붉은 잉크 한 방울, 그 번져나감이 때론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진달래 앙상한데, 붉은 드레스 입고 절절한 노래를 부르는 동백. 겨울나기 팍팍한데 무슨 청승이냐 구박해도 붉은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매혹적인 첫 꽃을 보러갔다.

향일암에서 만난 붉은 절명

해를 향한 암자, 향일암으로 갔다. 돌산도에서 가장 남쪽, 최대한 먼 곳에 닿으면 확진자 수가 아닌 다른 소식이 있을 것 같았다. 살랑살랑 고양이 꼬리 같은 바람을 기대했으나 삭풍이 사나웠다.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 중 하나로 꼽히는 암자는 기묘했다. 좁은 바위틈인 해탈문을 빠져나오자 동백꽃이 “툭” 떨어졌다. 목이 부러져 떨어지는 꽃의 들릴락 말락 한 소리가 천둥 같았다. ‘왜 이제야 왔냐’며 추락하는 허공 속에서 눈 마주치는 0.1초의 찰나. 붉은 절명은 아름다웠다. 처음 내게 떨어진 꽃이었다.

매혹적인 향일암 동백꽃. 다른 나무들이 신록을 내기도 전에 용감하게 꽃을 피웠다.

다시 좁은 바위 틈 사이를 돌아들자 대웅전 격인 원통보전 마당이다. 시리도록 파란 바다가 넓은 품으로 ‘다 괜찮다’며 와락 안아주었다. 천수관음전 가는 길, 압도적 팽나무가 걸음을 세웠다. 바닷바람 앞에서 대서사시 같은 생을 살았음을 생김새로 말하고 있었다. 곁에는 동백이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 아래 서서 나무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침묵하는 바다를 향한 동백의 마음이 눈에 들었다.

유명 기도터인 천수관음전 난간에는 방문객들의 소망을 적은 황금색 코팅지가 빽빽이 걸려 있었다. 누군가 ‘돈 권력 여자’라고 큼직하게 적은 글귀가 보였다. 천수관음상 표정이 조금 심란해 보였고, 바다는 관심 없다는 듯 평온했다.

향일암 종각 곁에 솟은 웅장한 팽나무. 배경처럼 동백나무가 초록을 이뤘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이정표가 이제 그만 둘러보고 산에 들자고 한다. 김지윤·권지혜(이대산악부)씨가 스틱을 꺼내들어 곧장 오르막에 접속한다. 향일암을 품은 돌산도 최남단 봉우리 금오산 산행에 나선다.

여수의 명소 상당수는 돌산도突山島 풍경이다. 1980년대 초에 연륙교가 생기며 육지화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 10번째로 큰 섬으로 해안선 길이만 104km에 이른다. 돌이 많은 산이라 ‘돌산도’라 불린다는 건 오해다. 바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갑자기 돌突’자를 쓰는데, 섬에 큰 산 8개가 있다고 하여 산山자, 팔八자, 대大자를 합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봉황산을 오르는 이대산악부 권지혜씨(앞)와 김지윤씨.

돌산도 최고봉은 봉황산(460m)이지만, 인기는 금오산(323m)이 더 높다. 풍수가들은 금거북이 바다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형상이라 하여 산 이름에 쇠 금金과 바다거북 오鰲 자를 썼다고 한다. 넘어가는 해가 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산행의 맛을 보려고 걸음을 서두른다. 섬산답게 급하게 고도를 올린다. 밀려오는 계단은 잡념을 비우기에 제격이다. 마음속엔 늘 이리 버릴 것 한 가득인지, 쓸데없는 상념들 서어나무 곁에 툭툭 떨궈 놓고 간단명료한 산길에 집중한다.

마음 비우길 30분, 247m봉이 바다와 섬이 버무려진 경치를 한 가득 내어놓는다. 금거북 머리답게 수평선 끝까지 펼쳐진다. 거친 바위가 솟았으나 친절한 데크 덕분에 편히 경치를 즐긴다. 데크 계단을 따라 전망대 다음 전망대, 친절하게 다도해 구석구석을 보여 주더니, 꼭대기는 자연친화적인 마당바위를 그대로 살린 전망 터다.

화태도, 대두라도, 개도, 금오도가 하나의 섬처럼 길게 뻗었다. 가쁜 호흡을 슬그머니 어루만지는 평화로운 바다의 향연, 늦은 시간이지만 역시 산에 오르길 잘했다. 향일암의 번잡함과 달리 세상 고요하다. 바람이 가만히 다가와 얼굴을 매만진다. 멍하니 있으니 10분이 찰나마냥 지나간다. 마음이 풍경을 닮는 걸까. 세상의 모든 모난 것과 작별하는 기분이다.

정상은 의외로 육산이다. 평범한 숲 한가운데, 오히려 과하지 않아 좋다. 평범한 된장국과 쌀밥이 메인 요리를 더 맛깔스럽게 받쳐준다. 율림치의 텅 빈 주차장에서 오늘 산행을 마무리한다.

파란 하늘이 있는 아침, 죽포리에서 봉황산에 든다. 아늑한 편백나무 숲을 지나 고즈넉한 산길이 이어진다. 산중 임도를 가로지르자 경계를 넘어선 것마냥 급한 오르막이 덮친다. 멀리서 산세를 보았을 때부터, 한 성질 할 줄 알고 있었기에 어려움 없이 받아 삼킨다 싶었으나, 자비 없는 오르막이 세다.

해발 270m를 수직 상승하듯 높이자, 표지석이 있는 정상(460m)이다. 시야가 막혔으나 50m 더 가자 전망데크가 나온다. 맞은편 금오도가 육지마냥 거대하게 솟아 시원한 맛은 부족하다. 경치는 어제 갔던 금오산이 한수 위다.

봉황산은 화려함보다 덕스럽다. 발 디딤 편한 구수한 흙길과 너른 산길로 뭍에서 온 이들을 어루만진다. 마지막에서야 짧은 바위맛을 보여 주고 다시 율림치 주차장이다. 돌산도 여행의 마무리는 여수 갯가길이다. 돌산도 해안선을 잇는 걷기길을 맛보러 바닷가로 갔다.

돌산도 유일의 모래해변인 방죽포해수욕장. 작지만 조용하고 소나무 방풍림이 아늑하다.

산길에 피가 묻어 있다.

돌산도에서 가장 감미로운 해변, 방죽포해수욕장은 아직 여름을 추억하는지 철 지난 안내문이 걸려 있다. 정장을 차려 입은 노신사 같은 소나무숲이 고풍스럽게 맞아 주었다. 정오의 햇살이 쏟아지는 해변은 아무도 없었다. 솔향과 갯내음 섞인 이곳에서 걷기 시작하려 했으나, 여기서 멈추고 싶었다. 소나무숲에 해먹 치고 누워, 숫자로 보도되는 매일의 비극이 지나갈 때까지 머무르고 싶었다.

방파제를 아기자기한 사진 명소로 꾸민 방죽포항.

걷기길이라 방심했다간 다칠 수 있다고, 비탈진 숲길이 경고했다. 걷기길이 산행보다 쉽다는 편견을 무너뜨리며 해안선 따라 한 굽이 두 굽이 돌아 넘었다. 이 마을, 저 마을, 작업이 한창인 어촌을 지날 땐 괜스레 팔자 좋은 도시인으로 비칠까봐 걸음이 빨라졌다.

어둑할 정도로 짙은 동백숲 터널, 피가 묻어 있다. 가만 보니 목을 꺾고 떨어진 꽃이다. 동백은 파도소리를 삼키는 걸까. 붉디붉은 적막이 감미롭다. ‘목메어 울어본 적 있느냐’고 동백이 묻는 사이, 늙은 겨울이 짐을 싸고 있다.

돌산도 최고봉인 봉황산 정상에 선 김지윤·권지혜씨. 정상 표지석과 근처의 전망 데크가 BAC 인증지점이다. 둘 중 한 곳에서 인증하면 된다.

돌산도 가이드

BAC 인증지점은 봉황산 정상이지만, 산행의 즐거움은 금오산이 크다. 금오산은 돌산도 최고의 명소인 향일암을 끼고 있어, 봉황산과 금오산 연계산행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죽포리에서 산행을 시작해 봉황산을 거쳐 주차장이 있는 율림치까지 6km이며, 여기서 금오산을 지나 향일암까지 4km이다. 볼거리와 식당이 많은 향일암에서 산행을 마치는 것도 좋지만, 향일암에서 금오산 방향으로 가면 오르막이 적어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

봉황산 죽포리 입구는 이정표가 없어 찾기가 까다롭다. ‘돌산읍 죽포리 1263번지’를 지나면 ‘상수원 보호’ 알림판이 있고, 여기서 20m 올라서면 왼쪽에 차를 세울 수 있는 비포장 공터가 있다. 이후로는 외길에 가까운 코스라 길 찾기는 쉽다. 봉황산 꼭대기의 전망데크와 정상 표지석이 5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모두 BAC 인증지점이므로 한 곳만 골라 사진 찍으면 된다.

핵심 경관만 즐기고자 한다면, 향일암 입구에서 능선삼거리로 올라 247m봉을 거쳐 향일암으로 내려오는 원점회귀가 알짜배기다.

봉황산 정상에서 율림치로 이어진 능선은 완만하고 편한 산길이다.

교통

여수시내에서 111번 버스를 타면 종점인 향일암 입구의 임포에 닿는다. 여수엑스포역에서 향일암까지 25km 거리이므로 렌트카를 이용하는 것도 효율적이다. 서울역에서 여수엑스포행 KTX가 하루 5회(07:05, 09:48, 12:40, 16:38, 17:38) 운행한다. 12시 40분 열차는 주말에만 운행.

맛집 BAC 플러스 가이드 기사 참조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4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