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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사람 아비가일 유가일 유학후원 편지

어지러운 시절 몸과 마음의 평강을 빌며 유가일 인사드립니다. 저는 저를 알고 아껴주시는 분들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사모하는 분들께 이 편지를 쓰고 있고, 제게는 당신이 바로 이런 분입니다. 저는 올해 가을학기 미국 동부 메노나이트대학교(Eastern Mennonite University, EMU)의 정의평화구축센터(Center for Justice and Peacebuilding, CJP)에서 갈등전환학 석사과정 입학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와 마음을 나누고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을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데 미리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독실한 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 예수님을 제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대학시절부터 이슬람권 선교헌신자로 훈련받아왔습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이슬람권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한편, 기독학생연합과 학원복음화협의회 및 한국리더십학교의 간사로 사역했습니다. 9년 동안 속해 있던 올네이션스 경배와찬양 모임을 통해 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예배하며 그분의 음성을 청종하는 법을 배우고, 한국리더십학교에서는 하나님나라 신학과 통일한국을 준비하는 섬김의 리더십을 공부했습니다. 2003년 2월, 석사논문을 제출하러 학교에 갔는데 후문에 대자보가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이라크 인간방패 10만 명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가서로 말씀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침의 QT

이 말씀을 읽은 후 평소처럼 ‘적용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제 마음에 세미하게 “가겠느냐?”하는 질문이 들렸습니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몰려와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께서 제게 죽음을 요구하신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또 여쭈었습니다. “당신께서 평화를 원하신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서 과연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로마서 12장 15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특별한 무슨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아파하는 사람들과 같이 울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안에 밀려드는 두려움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저 너무 무서워요…” 라는 말씀드림과 동시에 창세기 15장 1절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주님은 ‘네가 인간방패가 아니라 내가 너의 방패야’라고 하시는 듯했습니다. 그 아침 책상에 엎드려 한참을 운 후에 저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네 양이니 네가 돌보라

주님의 선명하고 세심하신 인도는 2주라는 짧은 준비기간을 거쳐 요르단에 도착, 비자를 발급받아 이라크에 들어간 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 복음주의 단체와 대형교회 청년선교부에 속해 있었지만 평화에 대한 가르침을 들어본 적이 없는 저는 교회에서 파송받는 것을 포기하고, 이미 오래 전부터 이라크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인 평화팀(Christian Peacemaker Teams, CPT) 소식을 홈페이지에 게시한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를 찾아갔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도 CPT를 파송한다면, 제가 지원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고, KAC에서는 북미의 메노나이트 교회들과 상의한 후에 평화사역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저를 파송해주셨습니다. 현지 상황이 위급하여 비자 발급이 불가능했는데도 ‘평화운동 비자’가 발급되어 이라크에 입국할 수 있었고, 수십 년 현장 경험을 가진 국제평화운동가들인 Iraq Peace Team(IPT) 및 CPT와 함께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적들은 제게 날마다 일어났습니다.

선전포고 하루 전 바그다드 해방광장에서 한국춤 퍼포먼스를 할 수 있게 준비시키신 것도, 폭격으로 건물이 흔들릴 때 “나와 함께 있자”는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셔서 제 두려움을 단숨에 걷어가시고 부활의 소망을 믿게 하신 것도, 중증장애고아원 Dar Al Hanan(자비의 집)을 찾아가게 하신 것도 주님이셨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세운 사랑의 선교단에서는 수녀님들이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계셔서 마음이 놓였지만, 후세인 정부가 사라진 상황에서 국영 고아원 상황이 걱정되어 수소문해 찾아갔는데, 아니나다를까 백여 명의 장애아들을 돌봐야 할 원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모두 도망가버려 아이들은 침대에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제 마음에 “네 양이라 네가 돌봐라” 하시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걸프전 당시 사용된 열화우라늄탄의 여파로 심한 기형으로 태어난 그들을 만날 때, 한 사회가 붕괴되면 사회적 약자들이 가장 크게 고통받는다는 것과 ‘고아들의 아버지(시 68:5)’께서 왜 저를 그 땅에 보내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짐을 Dar Al Hanan으로 옮기고, 한국에서 보내주신 후원금으로 50명의 직원들 급여를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잠시 들어가 아이들을 돌볼 봉사팀 Salaam Iraq Volunteers를 모집해왔습니다. 그렇게 무정부상태에 관리자가 없는 시설을 두 달 동안 운영하는 동시에, 구호물창고로 사용되다 약탈로 파괴된 시각장애인 학교 Al Nur School 시설을 복구하기 위한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뜻 안에서 움직일 때 충만한 행복을 누렸습니다.

한밤중의 총소리

그러던 어느 여름밤, 제가 사는 마을 전체에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폭격도 지나고, 시가전도 소강상태인 상황에서 미군 캠프를 공격하는 D-day인가 싶은, 난데없는 총소리였습니다. 몇 달 전에 전화국이 폭파되어 낮에 시내로 나가지 않으면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평화봉사팀 몇 명이 옥상으로 자러 올라갔는데, 팀원의 플래쉬 불빛을 보자 총격은 저희 숙소 옥상 쪽으로 집중되었습니다. 저는 “얼른 불 끄고 내려오세요!” 소리쳤습니다. 그때 봉사팀이 머물던 집의 1층은 거실 전면이 유리창이었는데, 불을 끄고 침대 밑에 엎드려 숨죽이던 몇 초, 몇 분 동안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제 머리 위로 미사일이 지나가는 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짧은 순간 저는 제가 일하는 곳에 다시는 사람들을 부르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위험에 빠지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이 장면에 기억이 가 닿을 때마다 쓴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유난히 긴 침묵의 밤

그해 여름 귀국해서는 좀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집과 교회, KAC 사무실로 기자들이 들이닥쳤고, 강연과 인터뷰, 방송 출연과 각종 회의 참석을 요청받았습니다. 마침 한국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저는 국익을 명분으로 파견된 군인들이 전장에서 겪을 일을 생각하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파병 반대 활동을 해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큰 소리가 들려도 깜짝깜짝 놀라고, 무기가 나오는 영화는 볼 엄두도 없고, 뉴스에 이라크가 나오면 앞뒤 정황이 다 눈앞에 그려져서 뉴스를 볼 수도 없고, 현지에 두고 온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길을 걷다가도 눈물이 났습니다.

잠을 자면 꿈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비폭력시위대가 군인들에게 무차별사살 당한다든지, 무슬림 남성이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노동자들이 높은 건물에서 떨어져 죽고, 평화활동가가 제 앞에서 발을 헛디뎌 구렁에 빠지면서 저를 원망하고, 미사일이 바다로 빠지고, 비행기가 추락하고, 지진이 나기도 했습니다. 제 방으로 미군이 총을 들고 들어왔는데 다른 사람이 저를 보호하려다 대신 죽는 등 시체로 가득한 꿈을 무수히 꾸어서 이불 속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울면서 깨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제 상태가 하도 이상해서 혼자 책을 읽다가 제가 참전 군인들이 흔히 겪는 Shell Shock(포탄 충격)과 같은 증상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다루는 학회 교수님을 만나뵙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PTSD가 정신과 질환 중에 가장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저와 제일 가까워야 할 전 배우자가 저의 모든 활동을 불안해하며 외부출입과 인터넷 글쓰기를 금지시켜서 집 밖을 나가기도 힘들었습니다. 바깥에서는 지속적인 요청이 있고, 이라크에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하면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 할 것 같은데, 제가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이 심하게 반대를 하니 내적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시댁에서도 제가 남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며 비난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했는데도 결혼생활마저 무너지자 2004년, 첫 번째 자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당혹케 한 것은 주님의 완강한 침묵이었습니다. 그토록 친밀하고 섬세하게 말씀으로 인도해오셨던 주님이, 제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다무셨다고 느껴졌습니다. 이전처럼 예배하고 성경을 읽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금식하고 상담까지 받아도 성령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저를 외면하셨습니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시간이 4년 간 지속되자 저는 급기야 ‘하나님이 없거나 나를 버렸거나’ 하고 결론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실 리는 없으니 제가 크게 죄를 지어서 벌하신다고 생각했고,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밤낮 고민을 해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으니 결국 믿음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 있기도 했습니다. 영혼은 이미 죽었는데, 겉으로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제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차라리 몸이 다쳐서 왔더라면 사람들이 내가 처한 상황을 알아챌 수 있지 않았을까?’였습니다. ‘나는 왜 아직도 살아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저는 점점 말을 잃어갔습니다.

너의 이름을 새롭게 하리라

그러던 2005년 가을 어느 날, 저는 동두천의 한 작은 예배당 의자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사라져버린 이가 이혼을 요구해와 가정법정에 다녀온 직후였습니다. 기도할 힘도 없고 눈물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십자가를 바라보며 누워 있던 제 입에서 한 노래가 조용히 흘러나왔습니다.

이 찬양을 부르면서, 주님께서 저를 내버리지 않으셨으며 저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공동체예배에서 사무엘상 25장을 함께 읽다가, 나발의 아내였으나 다윗이 복수심에 사로잡혀 무의미한 피를 흘리지 않도록 설득해낸 지혜로운 평화의 여인 아비가일(Abigail)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 따르면 아비가일은 다윗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정체성을 회복시켜준 사람입니다. 그 이름의 뜻을 찾아보니 ‘아버지의 기쁨’(하나님의 기쁨이 된다)이라는 것을 알고, 주께서 주시겠다던 새 이름이 아비가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005년 10월, 저는 ‘반전평화운동가’로 이미지가 굳어진 유은하라는 이름을 버리고 아비가일에서 따온 유가일(兪佳日: 갈수록 아름다운 날들)로 개명하고 잠적을 택합니다. 다시는 ‘평화의 ㅍ’ 근처에도 가기 싫었습니다. 2008년부터 3년 반 동안 저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낯선 나라 아제르바이잔 대학에서 한국어와 문학을 가르친 것이 제게는 유일한 쉼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바위 위에서

그런데 2011년 여름 귀국하자마자 해군기지 반대운동이 한창인 제주 강정마을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평화활동가들이 그곳에서 구속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가봤던 것입니다. 난생처음 방문한 제주는 한 편의 시(詩)처럼 아름다웠고, 앞에는 태평양, 뒤로는 한라산이 보이는 1.2km 용암바위지대인 구럼비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강정 앞바다에는 종종 돌고래 떼가 찾아오고 연산호 같은 수중생물이 가득해 유네스코가 생물권 보존지역으로 지정한 바가 있지요. 바위 틈에서 샘솟는 물로 수많은 연약한 동식물들을 넉넉히 품어 기르는 따뜻한 구럼비는, 만물을 지으시고 지탱하시는 ‘반석이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을에는 2003년 바그다드로 미군이 입성하기 며칠 전 상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위기감과 공포가 가득해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지요.

저는 주님의 손길이 닿아 있는 구럼비를 폭파해 뭇 생명을 죽이고 마을 공동체를 깨뜨리면서 전쟁 위협을 높이는 군사기지 건설을 강행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국민을 대상으로 군사작전을 펼치면서까지 구럼비를 발파할 43톤의 화약들을 수송하고, 주민 대부분을 범법자로 만드는 일이 제 조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국가안보’라는 명분으로 행사되는 공권력으로부터 그 땅과 바다를 지킬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그곳에 당분간 머물기로 결정합니다. 제주 안에서도 육지에서도 고립된 이 작은 마을이 지켜질 것인가 고민이 많았는데, 그때 많이 불렀던 “강정아 너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마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의 평화가 시작되리라”로 시작하는 노래는 그곳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2011년 여름부터 1년 간 지내며 목격한 강정은 한국 내의 갈등과 분쟁이 집약되어 폭발한 곳이었습니다. 마을에 있는 동안 거의 날마다 물리적 폭력을 목격하고, ‘연행되거나 (수감자) 면회가거나 재판받거나’가 일상인 생활 속에서, 폭격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사이렌 소리에 반복 노출되면서 저의 오래된 PTSD와 우울증이 재발합니다. 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현장 상황을 SNS와 언론을 통해 국내외에 알려 사람들이 강정을 방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당시 5년째 해군기지 반대운동으로 생업조차 포기한 마을 주민들을 돕기 위한 농활로 시작하여 강정평화학교를 만들어 운영하고, 강정 지킴이들의 생활지원을 위한 기부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주로 했습니다. 제 불안한 상태를 알기에 집회현장에서 전경과 충돌하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사렸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 연행되었고, 서울에 올라온 이후에도 3년간 수사와 재판을 받고 결국 2주간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저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피해자의 두려움, 가해자의 죄책감

2014년 저는 서울의 한 기독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던 노근리에 관한 원고 편집이 맡겨졌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현장을 답사하고 관련자료를 연구하면서 정서가 극도로 불안정해졌습니다. 긴장 수위가 높아질 때마다 건강하지 못한 교제관계로 도피하려고 했던 시도가 무산되자 또 다시 극단적인 시도를 했고, 수개월 간 폐쇄병동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근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재활훈련을 거쳐 사회에 복귀한 이후로는 다시 병원에 갇히는 게 무서워 최대한 정상인인 척하며 살았습니다. 빵을 굽는 등 주로 몸을 쓰는 일을 했고, 관련 이슈가 있을 만한 곳은 절대적으로 피해다녔습니다. 2017년부터는 부모님이 계신 이천의 여러 물류센터에서 육체노동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몸을 혹사해야 생각이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2년 전 어느날 평소처럼 택배 터미널에서 야간 알바를 하고 있는데, 문득 ‘한밤중 숙소 총격 사건’이 떠올라 눈물을 흘리다 문득, 제가 ‘폭력의 생존자로서의 공포감과 함께, 그 사태를 막지 못한 가해자로서의 죄책감’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주님께서 돌보라고 맡기신 사람들을 현지에 남겨두고 빠져나온 데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제가 사랑하는 그 나라가 여행금지국가가 되어 ‘갈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는 슬픔,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에 대한 증오와 후회,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방관하고 계신 듯한 주님에 대한 원망까지, 한 번도 이름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동시에 제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도망다닌다면 평생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도 알았습니다.

그때, 몇 년 전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PI) 이재영 원장님이 EMU의 정의평화구축센터(Center for Justice and Peacebuilding, CJP)에 트라우마를 다루는 과정이 있다고 소개해주신 것이 기억났습니다. 관련 자료를 찾다가 STAR 코스(Strategies for Trauma Awareness and Resilience; 트라우마 이해와 회복을 위한 전략)를 안내하는 소책자 <트라우마의 이해와 치유>(캐롤린 요더 저, 김복기 역, 대장간, 2018)를 읽고, 제게 이 과정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약물 처방과 입원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이 증상을 치료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부하는 길밖에 없기에, 작년에 CJP 석사과정 입학준비를 시작해서 12월 입학허가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트라우마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정의평화구축이라는 전체적 흐름 안에서 트라우마 회복이 의미가 있기에 CJP의 3가지 전공(회복적 정의, 갈등전환, 변혁적 리더십) 중 갈등전환학(Conflict Transformation)을 전공으로 선택했습니다.

갈등 가득한 세상에서 변화 만들기

기독교 평화주의와 양심적 병역거부로 알려진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교단에서 설립한 EMU는 제자도, 공동체, 봉사, 평화라는 성경적 가치에 기반을 둔 학문기관입니다. EMU 안의 CJP는 실천, 이론 및 연구의 통합을 통해 글로벌 평화건설 커뮤니티를 교육하는 전문 프로그램입니다. 이곳은 세계 여러 분쟁지역에서 평화/인권사역을 경험한 이들이 주로 공부하러 옵니다. 제가 지원한 갈등전환 석사과정은 갈등과 분쟁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공부합니다. 단체, 지역사회 및 국가 안에서 개인과 구조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운동을 이끌 수 있도록 구비되는 과정입니다. CJP가 집중하는 영역은 갈등 분석, 대화 촉진, 중재 및 인권 옹호, 비폭력 직접행동, 회복적 정의, 예술과 미디어를 통한 평화 구축, 리더십 코칭 및 조직 개발, 트라우마 인식 교육 등이며, 4학기의 강의와 관련 기관 실습을 거쳐 갈등전환 석사학위 취득 후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 지역사회 / 글로벌 개발
  • 트라우마 회복력 프로그램
  • 신앙 기반 평화 구축
  • NGO 및 정부 리더십
  • 인권 옹호 / 인종차별 반대운동
  • 이민 및 난민 재정착 지원

등 다양합니다. 이중에서 저는 신앙에 기반한 평화구축, 구체적으로 평화사역자를 양성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데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제가 CJP에 지원하게 된 계기가 된 STAR 코스는 2001년 9.11 사태 직후,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겪은 공동체를 지원하기 위해 종교 및 지역사회 리더들을 훈련시켜 달라는 요청에 부응하며 EMU와 교회세계봉사단(Church World Service)와 함께 개발한 과정입니다. 그 이후로 60개국 이상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STAR 세미나에 참가했는데, 그 대상은 미군, 미국 국제개발청 직원, 난민구호 활동가, 인종차별 반대운동가, 종교지도자, 심리 치료사, 교사와 학생, 사회복지사 및 의료전문가를 포함합니다.

압도적인 폭력은 트라우마로 이어지고,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반복적인 폭력으로 다시 이어지기 십상이지만, STAR 코스는 신경생물학, 갈등전환, 인류의 안전, 영성, 정의실현의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여 개인과 지역사회가 겪은 충격적 경험을 다루며 관계를 치유하고 회복력을 구축하는 기술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회복은 정의 및 평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저는 개인적 필요 때문에 이 과정에 지원했지만, 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괴로움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제 경험을 통해 이제야 발견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직전에 다녀온 이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러시아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소문은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전쟁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으며, 폭음이 멈추었다 해도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한국만 해도 6.25로 대표되는 상처가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지역 갈등으로 이어져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뿐 아니라 제주 4,3사건과 베트남전, 5.18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굴곡 많은 역사를 통해 한국사회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흔을 공동체적으로 다룬 적이 있었나 의문이 듭니다. 일반조직뿐 아니라 한국교회 안에도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과 의도치 않은 채 주고받는 언어적/비언어적 폭력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저는 이 공부과정을 통해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으로 내상을 입고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트라우마 회복 전문가(STAR Practitioner)’로 준비되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간 준비되지도 않은 채로 국내외 분쟁현장의 평화활동에 참여하면서 제게 질문과 기도제목이 생겼습니다.

‘이런 일들은 특별한 개인의 헌신이 아닌 교회가 공동체로 행해야 하는 게 아닐까. 역사가 지속되는 한 전쟁의 소문은 계속될텐데, 우리 교회가 안타까워하며 기도하는 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담대히 따라가는 제자 공동체로서, 몸과 마음이 찢겨져 신음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그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신앙과 신학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우리 주 예수를 닮아가려는 이들이 평화사역단체를 통해 훈련되어 ‘평화가 깨어진’ 현장들로 파송되고, 그 땅을 섬기다 돌아온 이들을 교회가 다시 가족으로 품어 회복을 돕고, 평소에는 일상 속 관계의 긴장이 악화되기 전에 풀어내는 진정한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서 교회가 존재하는 꿈을 꿉니다. 그리하여 보내심 받은 땅의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목숨까지 내어줄 준비가 된 선교사들이 '평화의 왕 예수님이 이토록 당신들을 사랑하신다’고 증거하며 주님 다시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마침내 주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 온 교회가 주님의 품에 안겨 울며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계시록의 장면을 눈앞에 그리며 기도하게 됩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제 자신을 무슨 운동가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제 묘비에는 '그리스도인 유가일'이라고 적히길 바랍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저는 '화평의 복음(행 10:36)’을 살아내는 한국교회의 일원으로서, 평화선교사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꿈을, 감히 꿉니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마 5:9)이며, 주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요 14:27)를 그들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요즘 제 입을 떠나지 않는 노래가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로 시작하는 찬양입니다. 지난 어느 밤 '이 고통이 평생 사라지지 않겠구나'라고 깨달은 이후부터 이 공부가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주께서 허락하신 소망인지 확신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지 말아야 할 100가지 이유'를 댈 수 있을 정도로 제 안팎은 무너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 운전하면서 서울 병원으로 가는데 한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이 찬양을 따라부르며 저는 차 안에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20년 가까이 골방에 갇혀 '제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했던' 제 마음을 ‘내가 다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제 등을 토닥이시는 듯했습니다. 그 동안 ‘기억을 없애기 위해’ 몸부림쳐왔지만, 그 모든 시간을 관통하여 흐르는 주님의 은혜마저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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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는 혼자 비전을 키우고 개인적으로 결단해서 일하다 상처받아 잠적하는, 제가 속한 나들목교회의 김형국 목사님 말씀처럼 '독립군'처럼 일했다면, 첫 부르심을 회복하러 떠나는 모험의 여정에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가족인 여러분들과 마음을 나누며 함께 걸어가고 싶습니다

몇몇 분들과 이 소식을 나누면서 많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 과정을 소개해주신 KOPI 이재영 원장님, 이번에도 기꺼이 후원단체가 되어주신 KAC 문선주 총무님, MCC 동북아시아지부 김성한 대표님, 평화저널P김복기 선교사님, 눈물로 기도하며 축복해주신 한국리더십학교 이장로 교수님, 한없이 막막해할 때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도움과나눔 최영우 대표님, 오랫동안 긍휼한 마음으로 지켜봐주신 복음과상황 황병구 이사장님을 비롯한 제 믿음의 벗들인 나들목교회 가족들이 아니었다면 이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2022년 9월부터 2년의 유학기간 동안 필요한 재정은 학비와 생활비를 포함해 연간 4만 불 정도입니다. 5월에 유학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4월 30일까지 약 4만 달러의 잔고증명서를 학교에 제출해야 합니다. 현재까지 EMU의 부분장학금과 나들목양평교회의 교회매칭펀드로 약 1만 불이 확보되었고, 나머지 금액을 준비중입니다. 4월 말까지 준비된 금액의 부족한 부분은 개인대출을 고려하고 있으므로 추후 장기 후원도 가능합니다. 앞으로의 일정은 재정이 준비되는 대로 5월에 비자신청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8월 초 입국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기도편지를 쓰는 것은 언제나 힘에 부치는 일이지만, 제 이야기를 나눌 분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결 따뜻해집니다. 부디 기도와 도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어 긴 글 읽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유가일 유학후원위원회

위원장 - 황병구(복음과상황 이사장)

위원 - 기숙영(나들목양평교회), 김성한(MCC 동북아지부 대표), 문선주(KAC 총무), 이재영(KOPI 원장), 허현(ReconciliAsian 대표), 최영우(도움과나눔 대표)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5 301 140924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