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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의 약속! 천 번의 산행 BAC PEOPLE

하늘나라 간 딸과의 약속 지키려 천 번 산행한 류재호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일이다.

버스를 기다라던 중학생 딸은 5톤 트럭이 덮쳐 목숨을 잃고, 손녀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은 모친은 병원으로 가던 중 횡단보도에서 뺑소니차에 치여 숨졌다. 몇 시간 만에 일이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뒀었죠. 가족 산행으로 내장산을 갔었어요. 그때 딸이 ‘아빠는 산이 그렇게 좋아?’라고 묻기에 ‘우리 가족 다음으로 등산이 좋아’라고 했어요. 근데 이 녀석이 ‘그럼 등산 천 번도 할 수 있어?’라고 묻는 거예요. 엉겁결에 ‘당연하지’라고 했더니, ‘아빠의 천 번째 산행 때 나도 꼭 같이 갈께’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1989년 내장산을 찾은 류재호씨 가족

가슴에 비수가 꽂힌 그날 이 후 26년이 흘렀고, 하늘에 별이 된 딸을 둔 아빠 류재호(70)씨는 지난 8월 1,000회 산행을 했다. 금지옥엽이었던 딸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숱하게 산을 오른 것.

그의 열혈 산행은 BAC 앱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명산100, 명산100 어게인, 금북정맥, 한남정맥, 한남금북정맥을 완등했고, 한북정맥은 80%를 마쳤고, 명산100 플러스는 6개 산을 남겨두고 있으며, 섬&산100은 40개를 마쳤다(2022년 10월 기준). 류재호씨의 사연 많은 1,000회 산행은 화제가 되어, SBS ‘세상에 이런 일이’ TV프로그램에서도 섭외 연락이 왔다고 한다.

“우리 딸이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같이 버스정류장에 있었는데 5톤 트럭이 덮쳤어요. 우리 딸만 머리를 크게 다친 거예요. 구급차를 타고 큰 병원으로 가다가 딸이 죽고,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오다가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같은 날 줄 초상이 났어요.”

1996년 8월 20일이었다. 날짜도 시간도 심지어 날씨조차 잊지 않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계룡산 산행을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아이가 다쳤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은 것.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곧장 딸이 있는 동네병원을 찾았고, 크게 다친 딸은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구급차를 타고 가던 중 딸은 숨이 멎었고, 함께 탔던 아빠 류재호씨는 그대로 기절했다. 딸을 잃은 정신적 충격으로 기절한 것.

5톤 트럭의 내리막 과속으로 인해 딸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운전자 과실인데, 책임 보험도 들지 않은, 완전 무보험 상태였다. 기초생활 수급자라 압류할 재산도 없었다. 류씨의 어머니는 손녀가 다쳤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가다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넜으나 과속하던 차량에 치여 숨을 거뒀다. 뺑소니로 도망가던 차를 택시가 천안역까지 쫒아가 붙잡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몰랐어요. 딸 보내고 정신없는 와중에 신기하게도 천안의 그 많은 병원 중에 희정이가 있는 병원으로 어머니 시신이 온 거예요. 장례식장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았어요. 힘이 쫙 빠지면서 천장에 형광등이 돌고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주저앉은 걸 주위에서 부축해준 거였어요.”

류재호씨는 26년 만에 딸과의 약속을 지켰다. 지난 8월 15일 경남 사천 와룡산을 아내 손미자씨와 단둘이 올랐다. 그는 “집사람과 조용히 희정이를 기억하고 싶었다”며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것 같아…”라고 말끝을 흐렸다.

급변하던 1970~1980년대에 청춘을 살았던 이들 중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가난과 슬픔을 이겨내고 지금의 웃음을 짓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생의 산을 넘었을까. 류재호씨의 인생 종주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1953년 포천에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이었고, 그의 집은 더 가난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초등학교를 나왔으나, 생계를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봉제 공장장 소개로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저녁에는 공부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왔다. 어릴 적 시작한 봉제업은 그의 평생 직업이 되었다.

성실하고 사람들과 잘 어우러졌던 그는 성인이 되고부터 공장의 관리자를 맡게 되었다. 공장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29세에 서울 신길동에 35평 2층 단독주택을 구입했을 정도로 모든 게 잘 풀렸다.

안정된 일상에 금이 간 건, 사업을 시작하면서였다. “와이프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라고 지금도 후회하는 그는 1990년 자신의 봉제공장을 차렸다. 3년 만에 직원이 70여 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1990년대부터 외주공장의 해외 이전이 이루어졌다. 기업들이 인건비가 더 저렴한 중국과 동남아로 공장을 옮기면서 사업이 망한 것. 그의 말을 빌리면 “쫄딱 망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빚도 빚이었지만 마음의 상처도 컸다.

“공장이 망해서 무척 친했던 초등학교 동창을 찾아서 부산까지 갔어요. 전화통화를 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밤에 도착했는데, 초인종을 눌러도 문을 안 열어주는 거예요. 집 안에서는 친구랑 재수씨가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은 배고프다 그러고. 와이프랑 같이 죽자 싶더라고요.”

“택시를 타고 태종대 자살바위로 갔어요. 애들은 새우깡 한 봉지 주고, 택시기사에게 잠깐 구경하고 오겠다고 하고선, 비닐에 소주를 넣고 가는데 택시기사가 눈치 채고 쫓아와서는 ‘선생님 저렇게 예쁜 아들딸이 있는데 죽을 용기면 어떻게든 살아야하지 않습니까’하며 손을 잡는데……. 돌아와서 아들딸 안고 펑펑 울었지요.”

그는 가족을 데리고 맨몸으로 도망치듯 천안으로 터전을 옮겼다. 가진 건 빚과 기술뿐이라 당시 큰 봉제공장이 많았던 천안으로 갔다.

류씨는 “아내가 고생 많이 했다”며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퇴근 후 집에서 부업으로 미싱을 돌렸다”고 한다. 성실히 일에 매달려 10년 만에 빚을 청산했다. 천안에서 자리를 잡아갈 때쯤 딸과 모친을 잃었다. 그래서인지 “사업만 시작하지 않았어도…”하는 탄식과 “망해서 천안으로 내려오지만 않았어도…”하는 말을 조용히 읊조린다.

“월간<山>에서 일하다 퇴직한 박영래 선배와 친형(류재흥)이 친구였어요. 1980년부터 산 좋아하는 형을 따라 북한산 다니며 등산에 맛을 들였어요. 처음 간 지리산은 잊을 수 없어요. 노고단 산장에 묵었는데 함태식 산장지기께서 ‘산에서 술 먹으면 안 된다. 혼숙하면 안 된다. 환경 지켜야 한다’고 밤새도록 엄한 얼굴로 얘기하셨어요. 그 후에도 5번 정도 더 뵈었는데 지리산과 겹쳐져 그분이 떠올라요.”

1980년대부터 매주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산으로 향했다. 사업 실패 후에도 산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직접 ‘천안 에델바이스산악회’를 만들어 주도적으로 등산을 했다. 외지인이 산악회를 만들어 다닌다며, ‘산에서 각목으로 이유 없는 매를 맞는 등’ 일종의 텃세를 겪기도 했다. 대결 구도로 가기보다는 두루두루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친목 산악회를 안내산악회로 바꿔 누구든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는 “10년간 산악회를 운영했다”며 “회비를 받는 안내산악회였지만 합리적인 금액으로 운영했기에 남는 건 없었다”고 한다.

1996년은 혹독했다. 납품하는 트럭의 짐이 쏟아져 머리를 다친 그는 여파로 지금도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성대 종양 수술을 하여 목소리가 잠길 때도 많지만 산행만큼은 멈추지 않는다.

“전국의 철물점과 농약가게를 트럭으로 돌아요. 아내가 만든 농사용 앞치마, 토시, 마스크 같은 걸 제가 전국을 돌며 팔아요. 시골 철물점 가면 꼭 내 상품이 아니더라도 ‘낫 없냐? 장갑 없냐?’ 묻는 게 다반사예요. 1톤 트럭에 여간한 건 다 싣고 다녀요.”

이렇게 아내와 함께 일주일씩 전국을 누비며 돌아다니는데, 이 와중에 야영하고 산행을 한다. 한적한 계곡에 텐트를 치거나, 시골 정자에서 야영을 한다. 트럭으로 거래처를 오가는 중에 영동에서 백화산 올랐다가 내려오고, 영주에서 소백산 당일산행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일주일에 3회 이상 산을 찾을 정도로 일과 산행에만 몰두했다.

“등산으로 상처를 이겨냈다”고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제왕절개로 어렵게 낳은 딸이에요. 둘째를 가졌을 때부터 딸 낳으면 원하는 거 다 해주겠다고 집사람한테 얘기했었어요.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이에요. 무보험 대포 차량 기사가 1년형을 선고 받았는데, 그 사람 와이프가 면회를 왔는데 아기를 업고 양손에 아이들 손을 잡고 왔더라고요. 딸 셋이었요. 형 집행 5개월 만에 풀어 주라고 했어요.”

그의 딸 사랑은 유별났다. 딸이 무척 귀한 아들만 있는 집안에 태어난 딸이었다. 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너무 기뻐 관악산에서 춤을 추고, 꽃을 꺾어 왕관을 만들어 주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보고 싶을 때면 포천 선산에 가서 야영해요. 화장해서 거기 뿌렸거든요. 산에 혼자 가서 야영하면 마음 놓고 울 수도 있고, ‘류희정’하고 이름을 크게 불러볼 수 있거든요.”

딸과 모친을 보내고, 처음에는 등산도 싫었다. 아내는 우울증에 걸려서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산도 필요 없다. 내가 죽을 건데 다 필요 없다”며 1969년 창간호부터 모았던 월간<山> 잡지와 등산 장비를 모두 내다버렸다.

“자살하려 몇 번이나 마음먹었고 산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으려 했는데…, 죽는 것도 아무나 못하겠더라고요. 막상 무서워서 못 뛰겠더라고요. 살아야지 어떡해요.”

원래 등산을 싫어했던 아내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남편과 등산을 시작했다. 류재호씨는 딸을 보내고 나서부터 산악회 단체 산행에 섞이지 못했다. 혼자 산에 가거나 아내와 단둘이, 혹은 친한 지인 몇 명과 산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아내 손미자씨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집 밖을 나가는 것도 끊었다. 깊은 상실감에 세상과 연을 끊어내는 과정이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야했기에 류씨는 아내를 산으로 이끌었다. 절망에 빠진 “아내를 일으켜 세운 건 블랙야크”라고 한다.

“와이프가 BAC 인증을 하면서 뭔가 하겠다는 의지를 갖기 시작했어요. 열심히 일하고, 일주일에 3~4회씩 열심히 인증했어요. 어떤 때는 와이프가 시간 남았으니 산 하나 더 타자고 조를 정도로 적극적이예요. 다른 도전자들과 선의의 경쟁하는 것도 재밌어요. 집사람이 등산 정말 싫어했는데 이제는 먼저 산에 가자고 해요. 블랙야크가 우리 와이프를 정상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줬어요.”

아내와의 조용한 산행을 하면서 그는 다시 일어섰다. 아내를 위한 산행은 그에게도 약이 되었다. 산에서 실컷 걷고, 울고, 웃으며 일상의 활력을 되찾았다. 매일 산에 가는데도 그는 산행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는 “산 사람이 산에 다닐 수 있는 쾌락이 있으면 대기업 회장도 부럽지 않다”며 “일흔 되도록 기운찬 건강의 비결”이라 말한다.

우울증의 아내를 위해 미싱을 사주고 유림산업이라는 개인 공장을 시작한 것이 행운을 가져오기도 했다. 면으로 만든 유림마스크가 히트를 쳤다. 오랫동안 여성 브래지어를 만든 경험을 살려 부직포로 입에 달라붙지 않게 만든 것이 농사용 마스크로 인기를 끌었고, 코로나 초기에 “며칠 밤을 새워 제작했을 정도”로 주문이 줄을 이었다.

일도 산행처럼 치열하게 하는 류씨 부부는 농한기인 10월부터는 다른 일을 한다. 급식 회사에서 새마을금고 인재개발원에 음식 납품하는 일을 한다. 300명분의 식사를 트럭에 싣고 이동하여 배식하고, 청소까지 하루에 3끼를 납품한다.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상당한 강도의 일을 하는 것.

그의 아들은 “고된 일 그만하시라”고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는 “하늘의 별이 된 딸을 위해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한다”며 “바쁘게 일하면서 사람 만나고 부대끼는 게 행복하다”고 말한다. 한국철도공사에 입사하여 천안역에서 일하는 아들이 한없이 자랑스럽지만, 일할 힘이 있는데 놀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우리 며느리가 BAC 인터뷰 한다고 블랙야크에서 신제품으로 장만해줬어요. 돈이 꽤 들었을 텐데 내색도 안하더라고요. 이젠 며느리가 딸 역할하고 있어요. BAC매거진에 나오는 거 자체가 행복이죠. 다 읽어봐서 아는데 아무나 못 나와요.”

“셰르파들에게도 고마워요. 다 자기 일 있는 사람들인데 도전자들 위해 희생하거든요. 강태선 회장께도 고마워요. BAC가 또 다른 산 인생을 열어줬어요. 제가 충남산악연맹 부회장을 몇 년 했었는데 당시 강태선 회장이 서울시산악연맹 회장이었거든요. 블랙야크가 대기업 되기 전에 충남산악연맹 행사 때 와서 우리를 격려해줬어요. 요즘은 인증하러 산에 다니니 내 건강 비결은 블랙야크나 마찬가지예요.”

칠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이는 그에게 일주일에 2회 이상 산행하는 건강 비결을 물었다.

“건강하게 산에 다니는 게 제겐 최고의 행복이에요. 산에 올라가서 탁 트인 경치 보면 부자들 하나도 안 부러워요. 부자들이 산에 가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게 건강의 비결이고, 최고의 행복이에요.”

최근에 그는 다시 기이한 일을 겪고 있다. 12일 동안 트럭 사고가 3번 난 것. 청양에 있는 거래처에 제품을 납품하고 오는 길, 손미자씨가 금북정맥 인증 못 한걸 하고 싶다 했고, 그는 완등 했음에도 아내를 데리고 2개 산 인증 산행을 했다. 열흘 동안의 출장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나선 산행이었고, 피곤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는 순간 졸음운전을 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다친 곳이 없었으나, 길가의 경계석에 부딪힌 차는 폐차해야 할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경찰이 와서 보고선 “어떻게 차가 이렇게 망가졌는데 다친 곳이 없냐”고 놀랐다고 한다. 그는 “희정이가 도와줬다”며 “우리 딸이 아빠를 지켜준다”고 믿는다.

일을 해야 하기에 곧장 중고차를 사서 오는 길. 차를 길가에 세워뒀는데 저절로 움직여 중앙분리대의 나무에 가서 부딪힌 혔다. 정비소에 가보니 차를 너무 오래 세워둬서 실린더 압이 터져서 생긴 사고였다.

반품하고 다시 트럭을 샀는데, 이번엔 주차해놓은 차를 음주운전 차량이 와서 들이 받았다. 승용차는 폐차할 정도가 되었고, 그의 차는 400만원 정도의 수리비가 들게 되어 상대방 과실로 보험처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12일 동안 3대의 트럭이 사는 족족 폐차하거나 망가졌고, 아내 손씨는 겁이 나서 차를 타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26년이 흘렀지만 그는 딸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린다. 그는 산에서 시원한 경치도 즐기지만, 슬픔도 가라앉힌다.

“산에 가서 딸 이름을 부르면 왠지 딸이 대답하는 것만 같아요. 설악산 보다는 지리산을 혼자서 많이 가는데, 달밤에 가면서 ‘류희정’ 부르면서 걸으면 한밤중에도 두렵지 않아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을 위한 조언을 청했다.

“가족이 중요한데 나는 산에 미쳐 있었어요. ‘아빠 산에 가지만 말고 나하고도 놀아줘’ 했던 게, 가슴에 한이 되었어요. 가족이 가장 소중한데, 잃기 전에 시간을 많이 가지세요. 딸 잃고 나니 가정이 파탄이 나더라고요. 후배들이 잊어버리라고 하는데, SNS에는 웃는 사진 올리지만 잊어버려지지가 않아요. 평생 가슴에 묻고 사는 거죠.”

딸과 약속했던 1,000회 산행을 지킨 그는 새로운 약속을 하늘에 있는 딸과 맺었다. 5년 내에 2,000회 산행을 하겠다는 것. 그 이후 벌써 58회 산행을 했다.

8월 15일 그의 1,000회 산행에는 천안 산꾼들이 현수막을 만들어 오겠다고 했지만 사양하고, 아내와 조용히 단 둘이 올랐다. 사천 와룡산 정상에서 수기로 쓴 종이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아빠는 산이 그렇게 좋아?”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정상에 서자, “왠지 모르게 후련한 기분”이었다며 “딸이 곁에서 함께 걷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눈물 많은 아빠, 류재호씨의 행복한 2,000회 산행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