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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최고 미녀의 정상에 얽힌 사연 민병준 칼럼

설악산 대청봉엔 무엇이 있었을까!

남한 최고의 미녀는 누가 뭐래도 설악산이다. 이 미인의 정수리엔 사연이 참 많다. 과연 오랜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미녀가 속삭이는 추억 속으로 들어가 보자.

흔히 설악산을 금강산이나 지리산과 비교한다. 그러면서 설악산을 아우 취급한다. 아름다움은 금강산에 뒤지고, 산신(山神)의 역사는 지리산에 못 미친다고. 그렇지 않다. 미모는 금강산에 버금가거니와, 산신령 나이도 지리산에 뒤지지 않는다.

사실, 이제 우리는 설악산 미모가 금강산과 동격임을 우리는 안다. 우리나라 1세대 산악사진가인 김근원 선생의 공룡능선 흑백사진을 감상한 분들이라면, 아니 설악산의 천불동이나 공룡능선을 한 번만이라도 걸어본 이라면, 이성과 감성으로 이를 인지한다.

그러나 ‘설악산 산신’이라면 고개를 갸웃한다. 설악산 산신령? 지금은 대청봉에 표지석 하나만 달랑 서 있을 뿐이지만, 지리산 천왕봉처럼 설악산 대청봉에도 산신을 모시는 제단이 존재했다.

대청봉에 인적이 드물던 1930년대로 돌아가 보자. 노산 이은상(1903~1982)의 산악 명저인 『설악행각』을 넘겨보면, 노산이 설악산을 찾았던 1933년 가을, 대청봉 정상엔 오래된 제단이 존재했고, 거기엔 위패도 있었다.

노산 이은상의 『설악행각』이 실린 책자. 노산이 1933년 가을 설악산을 샅샅이 답사하고 기록한 이 기행문은 설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경전이다.

노산은 세 개의 위패 중 가운데엔 ‘설악상봉국사천왕불신지위(雪嶽上峰國司天王佛神之位)’, 왼쪽엔 ‘팔도산신중도신령(八道山神中道神靈)’, 오른쪽엔 ‘설악산신령(雪嶽山神靈)’이라 쓰인 위패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집도 있었다. 노산은 당집과 제단에 대해 『설악행각』에 이렇게 적었다.

“그전에는 상하 두 청봉 사이에 규모도 적지 아니한 번듯한 집채가 있었다고 합니다마는, 지금은 터만 남았을 뿐이요, 그 대신 이 산의 가장 높은 마루 위에 돌담으로 두르고 기와도 덮은 조그마한 제단이 있습니다.”

제단은 정상에 있었음이 확실한데, 당집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였을까. 노산은 ‘상하 두 청봉’ 사이라 했다. 상청과 하청? 설악을 꽤 다녔다는 산꾼도 귀에 익지 않을 수 있는 지명. 상청은 지금의 대청이요, 하청은 지금의 중청이다.

그러니까 당집은 대청봉과 중청봉 안부, 즉 지금의 중청대피소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여러 자료를 뒤졌다. 대동여지도는 물론, 여러 고지도 어디에도 당집은 표기되지 않았다. 그러다 1910~20년대 제작된 근대지도에서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제작된 근대지도의 설악산 일대. 대청봉과 중청봉 사이에 당집으로 추정되는 집이 한 채 있다.

축척이 1/50,000인 그 지도를 보면, 지금의 대청과 중청 안부에 건축물이 하나 희미하게 표현돼 있다. 오래전엔 잉크 번짐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가 다시 보니 민가를 표현한 듯했다.

혹시 설악 여느 골짜기의 그것처럼 화전민 집이 아닐까도 생각했는데, 눈잣나무 뒤덮이고, 너덜지대인 데다가 눈 많고 겨울바람 거센 고지대에 민가가 있을 확률은 적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다 노산의 기록과 비교해보면서 설악산 산신을 모시던 당집이라고 거의 확정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나이가 벼슬이다. 설악산 산신은 나이도 많다. 설악산은 통일신라시대엔 나라에서 소사(小祀)를 지내던 산이었다. 대사(大祀)를 올렸던 3산(경주 남산, 영천 완산, 경주 어래산), 중사(中祀)를 올렸던 5악(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팔공산)에 속하진 못했지만, 20여 개의 소사에 금강산과 함께 올라있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존재하던 당집은 1930년대 이전의 언젠가 허물어졌고, 제단도 1930년대 이후 가뭇없이 사라졌다.

현대에 와선 제단이 있던 자리에 정상 표지석들이 여러 번 세워졌는데, 제단의 돌담에 쓰였던 돌들은 아마도 정상석 돌탑과 정상석으로 활용됐으리라.

현재의 대청봉 정상석. 1985년 봄에 세워진 것이다.

정상에서의 인증샷! 예나 지금이나 인기가 높다. 거기서 사진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정상석이다. 등산객들에게 인기 있는 지금의 대청봉 정상석은 1985년 봄, 당시 대청산장을 지키던 이옥모 씨와 산악인들이 함께 세운 것이라 한다.

물론 이전에도 미녀의 정수리임을 알리는 표식은 존재했다. 2015년 이전 대청봉에 올랐던 등산객들은 기억할 ‘요산요수(樂山樂水)’와 ‘산은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산처럼 의젓하게 되자’ 비석은 1966년 10월에 세워진 것이다.

1966년 ‘요산요수’ 비석을 세운 에코클럽 회원들. 사진은 김근원 선생이 찍었다.<출처 : 『에코클럽 60년』>
대청봉의 ‘산은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산처럼 의젓하게 되자’ 비석. 1966년 에코클럽 회원들이 비석을 세우고 찍은 기념 사진이다.<출처 : 『에코클럽 60년』>

당시 20대 젊은이였던 에코클럽의 산악인 김진수, 이원의, 오운소, 현정웅 씨가 인제 용대리부터 지고 올라갔다. 그 기록 사진은 김근원 선생이 찍었다. 비석 글씨는 대한산악연맹 창립에 힘쓴 당시 국회의장 이효상 씨 작품.

1966년 이후 정상석 역할을 하던 두 비석엔 아쉽게도 ‘대청봉’임을 알리는 글씨는 없었고, 이후 최고봉임을 알리는 정상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했던 것이다.

1970년대엔 대형 항아리 뚜껑만 한 평편한 돌에 대청봉이라 새겨진 정상석이 돌탑 위에 올려져 있었다. 당시 대청봉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세우지 않았을까 추정되는 이 표지석은 등산객들의 손을 타며 조금씩 깨져 덩치가 점점 작아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1980년대 중반까지 대청봉을 지켰다.

그러다 돌탑이 허물어지며 정상석도 함께 사라졌고, 그 다음엔 ‘대청봉’이라 새긴 화강암 사각기둥이 잠시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씨름선수 종아리 크기의 이 비석도 아주 무겁진 않았던 듯, 등산객들의 인증샷 구도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한편, 1986년엔 양양군이 대청봉 정상석 옆에 ‘양양이라네!’라는 비석을 세우며 대청봉 점유를 주장했다. 어른 어깨높이의 ‘양양이라네!’ 비석은 이웃 지자체의 거센 항의를 불렀고, 결국 국립공원은 2015년 ‘양양이라네!’ 비석을 철거했다.

이때 ‘요산요수’ 비석도 엉겁결에 하산을 당해 설악동의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이 원고를 쓰면서 보관 상황을 취재했는데, 안타깝게도 행방이 정확지 않았다. 현재 설악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필자의 확인 요청으로 비석들의 정확한 행방을 확인하는 중이다. 연락이 오는 대로 독자들께도 소식을 전해드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