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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구간 대야산 백두대간 에코트레일. 10

표지 : 설경도 낙엽도 없는 앙상한 계절, 산은 오히려 허심탄회한 속내를 보여 준다. 타오르는 바위불꽃처럼 치솟은 조항산이 처음 드러난 절벽 전망터에서 걸음을 뗄 수 없었다.

글 월간산 신준범 기자 / 사진 주민욱 기자

“꼴딱꼴딱” 숨 넘어 가는 이중환이 사랑했던 바위산

산이 두려웠다. 술 취한 광인이 귀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것 같은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간꾼의 기를 꺾어놓아 완주를 포기하게 만들기로 이름 높은 바위산의 악명 탓도 아니었다. 제법 많이 걸은 줄 알았는데, 대야산이 첩첩산중 지평선 끝에 있었다. ‘또 야간산행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걱정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배낭 무게, 얼어붙은 바윗길, 부족한 식수, 촬영 시간 등등. 그렇게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난코스인 대야산 구간이 시작되었다.

일기예보가 빗나가는 건 익숙했다. 오후로 갈수록 맑아질 거라 믿었지만, 산을 오를수록 내면 깊숙한 곳까지 먹구름이 밀려들었다. 날씨와 달리 종주대의 분위기는 화창했다. 머리보다 한 뼘 더 큰 야영배낭을 메고 줄지어 산을 오르는 이들은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팀원들이다. ‘명산 100’ 도전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정배 팀장을 비롯해 부원인 김진현씨와 유영열 셰르파, 백패커 민미정씨, 그리고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김미곤 대장이 특별손님으로 함께했다.

늘재를 출발, 청화산 정상에서 야영하고 조항산과 대야산을 거쳐 용추계곡으로 하산할 계획이다. 우리 생각을 꿰고 있던 것처럼 막 시작된 한파도 동행했다. 늘재의 백두대간 표지석이 고향집 문패처럼 서서 반겨준다. 사실 늘재의 주인공은 거대한 표지석이 아닌 음나무였다. 320년 수령의 음나무 보호수가 터줏대감이지만 고사했는지 사라지고 없다.

풍수지리의 대가이자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은 스스로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호를 지었을 정도로 청화산을 아꼈다. 이중환이 사랑한 청화산은 성질이 급하다. 둘러치는 것 없이 시작부터 화끈한 오르막을 들이밀며, 자신 없으면 돌아가라는 듯 엄포를 놓는다.

강수는 정수로 받는 법, 느리지만 꾸준히 고도를 높인다. 솔향기로 응원하던 소나무도 높아질수록 갈참·굴참·신갈나무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꼴딱꼴딱” 숨넘어가는 길의 쉼표는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이다. 모처럼 경치가 터지는 벼랑 위에 조금 생뚱맞은 비석이 있는 곳이 쉼터가 되어 준다. ‘백의민족 중흥성지, 백두대간 중원지’라는 글자가 한자로 적혀 있다. 2005년 인근 한농복구회공동체에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밧줄 당기고, 나무를 난간삼아 당겨가며 “끙차끙차”하고 오를수록, 검은 구름이 짙어진다. 구름에 걸맞은 우렁찬 소리를 내는 바람이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배낭 무게 때문인지, 영상촬영으로 지체되어서인지, 2시간이 넘도록 벌떡 선 오르막은 끝날 줄을 모른다.

대야산이 가까이 다가오자 거대한 바위가 힘자랑을 하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멀게만 보이던 대야산 정상에 올라 기쁨을 나누는 백두대간 에코트레일 답사팀. 대간을 타면서 야간산행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블랙야크 익스트림팀이자 한국도로공사 산악팀 소속의 김미곤 대장이 이번 종주에 힘을 실어주었다.

첫 개시에서 추락한 드론

2019년 월간<山>이 창간 5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깜짝 시도를 하고 있다. 고프로(액션카메라)와 스마트폰을 활용해 취재산행을 실시간 중계한 것이다. 산행만으로도 벅찬데 방송용 셀카봉까지 들고 오르는 좌충우돌 산행을 감행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방송 산행을 한 탓에 해가 지기 직전에야 청화산 정상에 닿았다.

주민욱 사진기자도 독자들에게 새로운 장면을 보여 주기 위해, 새로 구입한 값비싼 드론을 정상에서 날리고 있었는데 돌풍에 휘말려 추락하고 말았다. 오늘이 오기만을 벼르며 지난 한 달 동안 공원에서 드론 비행 연습을 했지만 물거품이 된 것이다. 결국 드론은 산행이 끝날 때까지 배낭 속 짐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청화산의 강수에 말려 취재산행은 엉켰지만, 침낭 속 잠자리는 편안했다. ‘청화산은 바위가 밝고 깨끗하여 살기殺氣가 적다’는 이중환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구름만 걷혀 주면 다행이라 여겼는데, 푸른 옷을 입은 청아한 미녀가 동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따스한 심성의 미녀는 무겁게 얼어붙은 산 구석구석을 따스한 빛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이렇게 따스한 출현이라니, 해돋이의 신비로운 풍경에 놀라 추위에 몸서리치던 사내들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진다.

산 정상에서 맞는 일출은 볼 때마다 놀랍지만, 새해를 맞는 1월의 일출은 더 특별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거대한 어둠을 가르며 떠오르는 태양보다 더 희망적인 장면이 있을까. 어떤 나쁜 운명의 흐름도 바꿔놓을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느껴진다. 무심결에 ‘그래 일어서자! 할 수 있어!’라고 다짐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힘이 실려 있다.

희망찬 다짐은 얼마 안 가 헉헉거림 속에 파묻힌다. 출렁임 심한 마루금의 흔들림 속에서 잊혀지고, 미끄러지지 않고 한 걸음을 내딛는 데만 몰두하게 된다. 잡념을 삼켜버린 냉혹한 겨울 아침의 고산능선은 오직 한 호흡, 한 걸음에만 집중하게 한다.

눈이 없는 겨울산은 초라하다. 단풍도 다 떨어지고 산이 가진 골격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회색으로 가득한 황량한 풍경 같지만, 산이 자기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보여 주는 것은 이때뿐이다. 더구나 조항산 같은 은둔고수를 만나면 아무런 치장이 없어도 반하고 만다.

858m봉과 무명봉을 넘어서자 절벽 끝에서 처음으로 거대한 북쪽 세상이 펼쳐졌다. 남덕유를 줄여 놓은 것 같은 화려한 바위산이 압도적인 힘으로 치솟아 있었다. 최종 목적지인 대야산은 그 너머로 지평선 끝에 살짝 보였다. ‘야성의 맹수 같은 바위 봉우리들을 어떻게 다 넘어 저 끝에 가나’ 하는 생각에 순간 산이 두려워졌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대야산과 청화산에 가려진 진짜 명산, 조항산에 취해 산꾼들만 아는 행복감이 온몸에서 번져 나온다.

날아오르는 봉황 같은 조항산도 좋지만, 오른편 농암면 궁기리마을이 눈길을 끈다. 거친 산줄기에 둘러싸여 깊은 산골이지만 너르고 밝은 터라 아늑해 보인다. 실제로 그렇겠냐마는 행여 악천후를 만나 거지꼴로 탈출해 어느 집 문을 두드리더라도 따뜻하게 맞아줄 것만 같다. 궁기리는 백제 견훤의 궁터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 예사롭지 않은 산골마을이다.

황홀한 클래식 선율 같은 대야산 노을에 취해 한동안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자연의 대서사시 같은 압도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조항산 능선길. 청화산 너머로 백악산과 속리산 묘봉 줄기가 아스라이 흘러간다.

장애물 같은 바윗길을 돌파하여 청화산으로 향하는 답사팀. 늘재에서 청화산은 2.9㎞로 짧지만 가팔라 땀 깨나 쏟아야 한다.

청화산 정상의 해돋이. 이제 막 눈을 뜬 답사팀의 쉘터 너머로 어둠을 깨치고 여명이 밝아온다.

대야산 닿자마자 해 떨어져

조항산의 진면모는 알면 알수록 감탄을 자아냈다. 험한 암릉을 오를 때마다 속 시원해지는 경치를 잔칫상처럼 내어주며 발길을 부여잡았다. 갈 길은 먼데, 경치가 너무 달콤해 속도가 나지 않으니, 고민스러우나 행복한 산행이다.

산세가 새의 목을 닮았다 하여 조항산鳥項山이란 이름이 유래하지만, 경치는 더 큰 전설 몇 개는 품고 있을 것이라 기대할 만큼 빼어나다. 표지석이 있는 정상은 좁지만 경치는 좁지 않아, 가야 할 대간 줄기가 지도를 보듯 속속들이 드러난다.

조항산은 백두대간이 품은 상처도 거침없이 보여 준다. 대간의 양쪽 날개를 잘라내듯 문경 쪽 고모치광산과 괴산 쪽 삼송리광산이 바위 산줄기의 살을 깊이 깎아낸 채로 남아 있다. 채석은 중단되었으나 10년이 넘도록 형식적인 복구만 이루어졌을 뿐 생태복원이 요원함을 여실히 보여 준다.

600m대로 고도가 떨어지는 고개, 고모령에서 오아시스 같은 샘터를 만났다. 고모샘은 다행히도 물이 콸콸 흘러나온다. 늦은 점심을 먹고 대간이 이끄는 대로 땀에 젖은 몸을 맡긴다. 역시 식후에 오르는 비탈길은 고역이다. 얼음 섞인 바윗길이 곳곳에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어 속도를 낼 수 없다. 854m봉을 지나자 지친 대간꾼을 위로하는 풍경이 연달아 나온다. 경복궁 후원에 어울릴 법한 앙증맞은 소나무가 있는 마당바위와 거인의 공깃돌 같은 바위더미가 산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밀재에서 국립공원 구역으로 들어선다. 대야산은 명성에 걸맞게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대야산의 유래는 몇 가지가 있다. ‘야耶’가 아버지를 일컫기 때문에 ‘큰아버지산’이라는 뜻도 있고, 정상이 대야를 엎어 놓은 모습과 비슷하다 해서 유래했다고도 하며, 홍수가 났을 때 봉우리가 대야만큼 남았다고 해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막강한 오르막과 시원한 경치가 번갈아 나오며, 대야산이 당근과 채찍으로 이끈다. 오후 5시가 넘자 어둠이 걸음보다 빠르다. 바람은 추격자처럼 집요하게 찾아와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마지막 정상에 닿은 기쁨을 누릴 사이도 없이 노을이 후다닥 셔터를 내리고 영업종료를 알린다. 순도 높은 어둠이 찾아왔다. 월영대를 거쳐 용추계곡으로 내려선다. 길을 몇 번 놓칠 뻔 했지만 김미곤 대장의 절묘한 길찾기로 고생을 면할 수 있었다.

계곡의 화려한 향연이 생략된 진한 어둠 속을 헤드랜턴 불빛으로 짚어가며 조심히 내려섰다. 야영 짐을 메고 12시간 넘게 걸은 탓에 노곤함은 극에 달했지만, 달콤한 풍경으로 과식한 탓에 마음만은 따사로웠다.

대야산 정상 직전의 고도감 있는 바윗길. 청화산과 대야산, 조령산, 희양산으로 이어진 구간이 대간 종주의 최난 구간으로 손꼽히는 바위산줄기다.

대야산 구간 종주 가이드

청화산과 조항산을 잇는 산행은 경치가 탁월해 일반 산행으로도 권할 만하다. 다만 대간 종주시에는 늘재에서 버리미기재까지 17㎞로 멀고 바윗길과 오르내림이 많아 체력 소모가 크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대야산에서 버리미기재까지는 비법정코스라 합법적인 산행은 늘재에서 대야산 정상까지만 가능하다.

늘재에서 청화산까지는 2.9㎞로 멀지 않지만 가파른 오르막이라 2시간은 땀을 쏟아야 한다. 청화산 정상은 아스팔트 헬기장이 있어 야영 터로 이용되며, 트여 있어 경치는 좋지만 바람이 심한 편이다. 조항산은 험악한 바위산 같아 보이지만 바위 사이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물론 고정로프를 잡고 오르는 잔잔한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밀재부터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하며, 바위산답게 계단과 고정로프의 연속이다. 정상에서 문경 용추골 방면으로 하산할 수 있다. 하산길도 가파르고 바윗길이 많아 주의해야 한다. 고모령에는 샘이 있어 식수를 구할 수 있다. 늘재에서 대야산까지 종주한 다음 용추골로 하산하는 산행은 19㎞이며 10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바위가 얼어붙는 겨울에는 난이도가 더 높아지므로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대간 종주가 아닌 경우 해발 680m에 자리한 원적사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비교적 쉽게 청화산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의상저수지를 기점으로 한 청화산~조항산 원점회귀 산행도 추천할 만하다.

교통

늘재에서 문경이 더 가깝지만 상주에 속해 있어 버스편은 상주행 버스만 운행한다. 1일 5회(07:40 ~18:15) 운행. 버스의 중간 기점인 화서면 화령터미널에는 청주를 거쳐 서울 남부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1일 6회(07:20~20:55) 운행한다. 용추계곡 입구(벌바위)에서는 문경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1일 4회(09:40, 11:50, 13:40, 18:10) 운행한다.

숙식(지역번호 054)

늘재에서 4㎞ 떨어진 화북면사무소 인근에 삼겹살전문 시루봉식당(534-7447)과 문장대식육식당(533-8868)과 백반전문 남이식당(534-1175), 중국음식점 새부일식당(533-7125)이 있다. 하산지인 용추계곡 입구에 대야산청주가든(571-7698)이 있다. 대형숙소로 국립대야산 자연휴양림(571-7181)이 있다.

미니 인터뷰

“사람들의 욕구를 풀어준 것이 성공 요인”

김정배 블랙야크 익스트림팀 팀장

“블랙야크 명산 100’ 프로그램을 기획한 주인공이다. 우리나라 등산 마케팅에서 가장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꼽히는 ‘블랙야크 명산 100 도전 프로그램’은 사실 전 직장에서 만든 것이다. 엄홍길 대장의 원정에 대원으로 참여했던 인연이 발판이 되어 엄홍길 휴먼재단 사무국장을 맡았던 것.

엄홍길 대장을 롤 모델로 등산 인증시스템을 구상했으나 2011년 블랙야크에 입사한 뒤 구체화시켜 지금의 ‘명산 100 성공시대’를 끌어냈다. 현재 도전 프로그램 스마트폰 앱 가입자만 8만여 명에 이르며 명산 100 완주자를 위한 연중행사에 수천 명의 등산인들이 몰리고, 매주말 명산 정상 표지석 앞에 블랙야크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도전자들이 줄을 선다.

힘 좋은 야크처럼 일관되게 밀어붙인 것이 주효했다. 그는 처음부터 ‘명산 100이 정답’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성공 요인에 대해 “사람들의 욕구를 풀어 주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내가 전국의 유명한 산은 다 올랐고, 어떤 산은 여러 번 올랐다고 얘기해도 누가 믿느냐는 거죠. 몇 백 개의 산을 올랐어도 나밖에 모르는 건데, 그걸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준 게 저희 도전 프로그램입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자기 능력을 인정받길 원하는 심리가 있어요. 우리는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마련해 준 거죠. 사회적인 SNS 열풍도 성공에 한몫했고요.”

김정배 팀장(청암산우회)은 산행과 암빙벽등반을 해왔으며, 한때 8개월간 거지같은 행색으로 네팔 곳곳을 누벼 ‘네팔 거지’라는 별명이 있는 산악인이다. 만능 아웃도어맨으로 등산과 러닝, 스킨스쿠버, 프리다이빙, MTB 등을 두루 즐긴다.

향후 아웃도어 시장 전망에 대해선 ‘정체기’로 예상하지만, “도전 프로그램이 다양해지고 사람들의 참여가 좀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블랙야크 인증 열풍은 쉽게 식지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