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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워킹이냐 등반이냐' 한상섭 마운틴 에세이

얼마 전 산사람들의 모임에서 전문등반을 하는 산악인들이 워킹산행하는 산악인들을 무시(?)하거나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약간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는 의견들이 오갔습니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겠죠.

아무래도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는 극한 등반을 하는 전문 등반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다보니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 아닐까요.

그 때 제가 이런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음악은 클래식으로 시작해서 재즈로 끝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진은 인물로 시작해서 인물로 끝난다는 말이 있구요.

등산은, 산행은 워킹으로 시작해서 워킹으로 귀결되는 것. 그런 행위 아닐까요…”

서양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클래식음악이 기본이고, 그만큼 재즈라는 음악이 난해하다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사진은 대부분 주변의 인물들, 아이, 애인, 가족 등을 찍어주기 위해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풍경사진이나 다큐멘터리, 보도 사진, 예술사진 등으로 발전되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많은 사진가들이 결국 인물사진으로 되돌아오고, 사진을 전공한 분들도 인물사진이 가장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렇다고 풍경사진 찍는 분들을 폄하하거나 그것이 쉬운 과정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전에 등반을 시작하던 초기에 남선우선배님(전 한국등산학교 교장, 현 대산련 등산교육원장)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남선우선배님은 고교시절부터 산악활동을 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왕성한 원정등반을 펼쳐 국내를 대표하는 산악인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자신이 산에 다닌 시간이 오래되었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산에 다닌 오랜 기간을 세 개의 기간으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개의 기간동안 자신의 인생을 수놓았던 산을 세 개의 색깔로 구분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산의 색깔은 '회색의 산'이었다고 합니다.

젊은 십대 그리고 피끓는 이십대 시절 그의 눈에 들어온 인수봉 선인봉 설악산의 화강암바위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처럼 보였을 것이고, 벽만 보면 올랐으니 그의 눈에는 산의 색깔이 온통 회색으로밖에는 안보였을 겁니다.

양정고시절의 산악반, 중앙대에 진학해서 다시 산악부활동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바위들을 올랐겠습니까

아마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두 번째는 '하얀색의 설산' 이라고 합니다.

좀 더 크고 모함적인 산을 오르기 위해 그는 히말라야로 향했고, 많은 히말라야의 고봉을 오르면서 무수한 생사의 갈림길을 넘으며 그에게 다가온 산의 색깔은 눈부신 하얀 산이겠죠.

남들이 하지 않았던 모험적인 히말라야 산악활동을 통해 그는 세계적인 선악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세 번째 산은 '녹색의 산'이라고 합니다.

바위라도 끓일 것 같았고, 얼음도 녹일 것같았던 피끓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 어느 덧 나이를 먹어

우리 산하를 다시 돌아보게 찾게 되고,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우리 산은 녹색이었다는 겁니다.

저는 남선우선배님 같은 많은 경험을 못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부분을 공유했고,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상황을 맞이하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워킹산행이든, 전문등반이든 자기 행위의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행위에 충실하면 분명 어떠한 성과와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다른 스포츠와 다른 무상의 행위, ‘등산’을 하기 때문에 성과보다는 과정에 의미를 두어야 합니다.

즉, 등산의 행위 자체도 중요하지만, 전 후까지의 프로세스도 중요합니다.

저는 또 등산이라는 행위에 어떤 이즘(ism)과 철학을 붙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등반이라는 것도 결국 내가 좋아서 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 속에서 함께 하는 친구와의 우정이 버무려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반드시 나와 같은 사상, 나와 같은 산을 바라보는 시각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비록 배움이 낮고, 질그릇처럼 투박하고, 여기 저기 이가 빠진 오래된 접시같은 사람일지라도,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낮더라도 권모술수가 없는 맑고 투명한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에 국립공원 등지에서 술마시는 행위가 금지되어 갑론을박 말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산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지만,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일정부분 찬성하고 싶습니다.

산장에서 자면서 한 두잔 마시는 거야 그렇다쳐도 한 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북한산, 도봉산 등지에서 냄새나는 홍어와 많은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막걸리와 소주 등을 곁들여 마시는 행위들은 결코 남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질 수 없으며, 환경오염과 악취, 안전사고로 이어질 밖에 없습니다.

저는 산행 시나 등반 중에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워킹하는 분들이 자주 한다는 ‘정상주’조차 한 모금도 하지 않습니다.

암벽등반이나 빙벽등반 중에는 즉 안전벨트를 착용한 상태에서는 한모금의 알코올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기도 한데, 적어도 산에 들어서는 그 과정에, 행위에 충실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산행이 끝난 후의 뒤풀이만큼 좋은 것은 또 없기에, 그 때는 거기에 그만큼 충실합니다.

벨트 풀어놓고는 누구 못지 않게 술도 마시고 여흥도 즐깁니다.

결론적으로 산악인의 본질은 산의 품에 드는 것이고, 그 전후 과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요즘 이런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등반의 본질은 무엇인가, 산악인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산에 다니는 사람 즉 산악인의 기술과 역량이 다 뛰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산에 다니는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높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저런 이유로 단계별 한계에 직면하곤 합니다.

그것이 현실적인 이유일 수도 있고, 불가항력적인 물리적인 이유가 될 수 도 있고 노력이 부족한 이유일 수 도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충실하느라,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느라 시간내기 힘들어 산에 자주 못 가거나 등반을 자주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납득이 됩니다.

삶에 집중하고 충실한 그 자체가 더 의미있고 소중한 행위이니까요.

우리가 프로가 아닐 바에야, 어차피 아무리 치열하고 열정이 넘쳐도 어디까지나 아마츄어/ 동호인 일뿐입니다.

어느 정도 등반의 그레이드, 단계를 넘어서는 기준이어야 하느냐는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산악인이라면, 끊임없이 새로운 벽, 새로운 산을 마주해야 하는 숙명을 가슴에 안고 산에 가는 '산악인'이라면, 끊임없는 자기개발과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합니다.

또 다른 존경하고 좋아하는 산악인이자 산선배인 정승권선배께서는 "산악인은 항상 언제 어디서고 강철같은 체력과 등반력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건 산악인이라면, 등반가라면 너무 당연한 기본, 자기관리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블랙야크 김정배팀장이 쓴 글(한국등산학교) 중에서 '산악인은 현재 진행형' 이라는 내용이 아주 와닿습니다.

그 글에서 산악인을 "더 높고 어려운 등반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과 훈련을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더군요.

대산련회장을 역임했고 77에베레스트 원정대장이셨던 김영도 선배님은 9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꾸준한 산행과 집필, 외국서적 번역일을 하십니다.

코오롱등산학교 대표강사를 거쳐 교장을 하고 계시는 윤재학 선배님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암벽 빙벽 등반 모두 젊은 클라이머 못지 않는 등반력과 체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언젠가 산 선배가 제게 물었던 질문 " 너 지금도 산에 열심히 다니냐!" 라는 질문에 저는 위에 열거한 선배분들의 산악활동에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산과 등반을 이유없이 조건없이 좋아하고 그 속에 들 때 무한한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활동을 더 잘하기 위해서 헬쓰장에서, 실내암장에서 땀흘릴 때 뿌듯함과 만족감을 느끼고 그 땀이 바위 위에서 얼음 위에서 어제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 가슴가득한 충만감과 보람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산에 다니는 이유일 것입니다.

늦었지만 이제 저에게 "아직도 산에 열심히 다니냐"고 물어봤던 선배의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한상섭

CJ제일제당 산악회 등반대장 회장 역임

정승권등산학교 한국등산학교 암벽반 빙벽반 수료

익스트림라이더 빅월 등산학교 수료

유럽 알프스 몽블랑, 마터호른 북벽 등정

설악산 대승폭, 소승폭, 토왕폭 등반

월간 마운틴 주최 산악문학상 수상

대한산악연맹 등산강사 2급

스포츠클라이밍 1급지도사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 칼럼니스트

블랙야크 셰르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