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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7구간, 희양산 백두대간 에코트레일. 11

표지 : 희양산 봉암에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다. 희양산은 백두대간에서도 보기 드문 거대한 화강암 봉우리다.

글 월간산 신준범 기자 / 사진 주민욱 기자

매혹적인 빛의 고래를 찾아서 “영차! 영차!”

오랜만의 매혹이었다. 구왕봉을 넘어선 순간 나타난 거대한 통바위 희양산은 산꾼의 마음을 꽉 움켜잡았다. 이 산을 스쳐 보내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끓어올라, 연신 사진을 찍었다. 압도적인 덩치의 신성한 빛을 지닌 흰수염고래가 산이 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빛나는 화강암 고래를 보고서야, 햇볕 ‘희曦’, 태양 ‘양陽’이란 이름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만 저 통바위 어디로 길이 나있을까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흘러나왔지만, 몸은 이미 달아오르고 있었다. 산에 온 몸 비벼 오를 순간을 빨리 맞고 싶었다. 희양산이 마치 ‘내게 오고 싶거든 전부 다 주오’하고 말을 거는 듯했다. 그 앞에서 숫기 없는 노총각처럼 볼이 벌게 진 채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번처럼 산행일정 짜기가 고민이었던 적은 없다. 25, 26, 27, 3개 구간을 가야 하는데다 비법정길을 제외하고 가려니 엉킨 실타래처럼 출장 스케줄이 복잡해졌다.

복잡한 수싸움일수록 단순하게 가야 하는 법, 첫째 날 장성봉을 오르고, 둘째 날 악휘봉과 희양산을 오르고, 셋째 날 백화산을 타기로 했다. 상당수의 대간 종주자들은 법정·비법정 가릴 것 없이 당일에 주파해 버리기도 하지만, 월간<산>과 블랙야크가 함께하는 에코트레일 종주인 만큼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

희양산 바윗길을 오르는 참가자. 고정로프를 붙잡고 용을 써야 오를 수 있는 곳이 많아 거리에 비해 체력과 시간 소모가 크다.

4명의 남성과 3명의 여성이 등산재킷을 단단히 여미고 배낭을 둘러멘다. 블랙야크 권태도, 박춘영, 김찬일, 성예진 셰르파와 박금영씨다. 박금영씨는 셰르파는 아니지만 블랙야크 100명산을 완등했으며, 박춘영 셰르파의 친동생이다. 익숙한 얼굴의 베테랑 등산인들이 손을 모아 짧은 기합을 외치고 산에 든다.

메마른 겨울이라 속도를 낸다. 눈이 없어 풍경은 휑하지만 얼음이 적어 걷기 수월하다. 대간길이 아닌 시묘살이계곡을 빠르게 주파한다. 지루할 정도로 완만한 계곡은 끝에 가서야 급하게 올려치며 백두대간과 상봉할 수 있었다. 경치 없는 아담한 장성봉은 실망스러울 법했지만, 한 달 만에 대간 봉우리에 다시 올랐다는 성취감이 더 컸다.

장성봉은 몸풀이일 뿐이다. 내일 가야 할 악휘봉~구왕봉~희양산~백화산 줄기가 진짜 산행이다. 짧지 않은 거리임에도 중간 도로가 없고, 오르내림 심하고, 아슬아슬한 바윗길이 많아 대간에서도 골치 아픈 숙제처럼 여겨지는 난코스다.

희양산 정상부의 바위 전망터. 바위틈 사이를 걸어 나가면 드넓은 빛의 풍경이 펼쳐진다. 대간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생략하고 가는 이들이 많지만, 풍경의 아름다움은 여간한 국립공원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악휘봉 안 왔으면 어쩔 뻔 했어”

둘째 날, 미세먼지가 기승이었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처럼 험봉들을 넘어야 한다는 약간의 긴장감이 깔려 있었다. 팽팽히 당겨진 시위는 입산 30분이 지나지 않아 풀어졌다. 은티마을에서 입석골로 대간 능선에 다가간다. 길은 의외로 선명하고 이정표도 많아 마음이 놓였다. 완만한 계곡길을 걷노라면 등 뒤에서 아침햇살이 쏟아지며 응원하듯 힘을 북돋아주었다.

삼형제처럼 800m대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다. 가장 서쪽의 잘생긴 암봉이 악휘봉樂徽峰이다. ‘아기봉’이란 이름이 변해 지금의 이름이 되었으며, 한자의 뜻처럼 산행은 즐겁고 아름다웠다. 정상 직전에 만난 입석은 바위가 솟대처럼 길쭉하게 서 있는데, 중간에 깨어진 틈이 넓은데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입석 뒤로는 말의 똥을 닮았다는 마분봉 줄기가 펼쳐지는 악휘봉의 기념사진 명소다.

말안장처럼 길쭉한 마당바위 위가 정상이었다. 대야산과 속리산 줄기가 말갈기처럼 휘날리며, 내달리고 있었다. 도시의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열린 경치에 오르막과 씨름하던 일행들의 표정이 모두 환해졌다. 정상이 대간 줄기에서 살짝 벗어나 있어 가졌던 불만은, ‘안 왔으면 어쩔 뻔 했어’로 변해 있었다.

악휘봉에서 대간은 북진하던 기세를 동쪽으로 꺾는다. 가야 할 산줄기가 늘어서 있어 마음은 급한데, 지하로 내려가듯 하산할 것 마냥 고도는 뚝뚝 떨어진다. 롤러코스터 같은 능선이 하강을 멈춘 곳은 은티재. 일본잎갈나무가 쭉쭉 뻗은 부드러운 안부에 문경에서 세운 안내판과 괴산에서 세운 이정표가 경쟁하듯 서 있다.

이화령에서 황학산으로 이어진 부드러운 대간길. 백화산과 황학산은 이화령에서 남진하는 방법을 택했다.

산행이 다시 시작된 기분이다. 지나치는 봉우리로 여겼던 구왕봉에서 고전한다.

땅에 코가 닿을 듯한 오르막이 끝도 없이 나온다. 계산상으로 희양산을 오르고 있어야 하는데, 아홉 용의 맹공격에 막혀 시간과 체력을 계속 쏟아붓고 있다. 구왕봉은 신라시대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세울 때 연못에 살던 아홉 용을 이 봉우리로 쫓아냈다고 해서 이름이 유래한다.

쏟은 땀에 비해 정상은 보잘 것 없다. 신갈나무가 빽빽한 둥근 달 표면 같다.

힘겹게 올린 고도를 다시 뱉어내고 가야 하는 대간꾼의 숙명, 바윗길 급비탈을 따라 한없이 내려간다. 문득 나타난 벼랑 위에서 거대한 화강암 통바위 희양산을 만났다. 산꾼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묘한 힘이 있는 첫 인상에, 긴장과 설렘이 걸음에 가득 배어난다.

지름티재에는 봉암사에서 세운 등산인 감시초소와 울타리가 있다. 희양산은 한때 바위의 기세보다 스님들의 출입통제로 대간꾼들에게 악명 높은 산이었다. 1982년 조계종에서 봉암사를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해 희양산 일대를 성역화했다.

일반인이나 등산객,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지금도 봉암사를 경유해 구왕봉과 희양산을 오를 수 없다. 문제는 대간 종주도 막아 대간꾼들에게 원성을 샀다. 때문에 지름티재에서 은티마을로 내려갔다가 희양산을 우회해 성터로 올라오는 방법으로 종주하기도 했다.

구왕봉 고정로프 구간을 내려서는 권태도 마운틴 셰르파. 히말라야와 알프스 고산을 오른 산악인에게도 한 겨울 대간종주는 쉽지 않은 과제다.

지름티재에서 636m로 고도를 한껏 낮췄다가 998m로 올려친다. 벽처럼 가파른 오르막이 난공불락의 철옹성처럼 대간꾼의 힘과 용기를 시험한다. 고정로프가 복잡하게 덕지덕지 달린 바윗길을 돌파하자 호흡이 증기기관차마냥 거칠다. 희양산 정상은 대간에서 살짝 비껴 있어 지나치는 이들이 많지만, 신성한 양기의 근원인 희양산의 시원한 경치를 지나칠 수 없어 정상으로 향한다.

태양의 양기가 담긴 산답게 선명한 햇살과 산그리메를 이룬 첩첩산중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다. 차마 발을 떼기 어려운 명작 같은 그림이 곳곳에서 펑펑 터진다. 하늘을 유영하는 고래 위에 올라 탄 것 마냥 매끈한 바위 절벽, 걷는 내내 명풍경이 따라온다. 주민욱 사진기자의 촬영이 바빠지고 일행들은 셀카 삼매경이다.

희양산 정상을 다녀오니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송곳 같은 바람은 더 사나워지고 해는 뉘엿뉘엿했다. 사다리재까지 가려던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이만봉 직전에서 대간을 버리고 구르듯 탈출한다.

희양산 정상부는 거대한 화강암 통바위 위라 지나온 대간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만 표지석이 있는 정상은 조망이 없다.

고요히 다가오는 백화산 오솔길

셋째날 아침, 전날 산행이 과했던 탓에 일어나기가 힘겹다. 천연덕스럽게 파란 하늘이 어린아이의 미소처럼 맑게 종주대를 응원한다. 도로가 지나는 이화령에서 남진해 백화산을 넘는 방법을 택했다.

-14°C는 산에 붙자마자 잊혀졌다. 고개에서 곧장 산행을 시작한다지만, 초반 가풀막은 항상 버겁다. 군 시설을 우회해 조봉에 올라서자 경치도 트이고 폐도 트여 몸이 가벼워진다. 서어나무, 일본잎갈나무, 잣나무, 굴참나무, 쇠물푸레나무가 번갈아 나오며 호젓한 오솔길이 길게 이어진다. 어제 산행이 필사적인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한결 여유롭다. 발 디딤 푹신한 오솔길로 향기롭게 고도를 높여서인지 편안하고 속도도 빠르다.

시간이 멈춘 듯 얼어붙은 산중 연못의 고요함을 헤치고 한 능선 올라서자, 중부내륙고속도로 너머 주흘산과 부봉이 ‘언제 여기까지 올거냐’며 물어온다. 귀여운 표지석이 있는 황학산에서 간식을 먹고 이번 구간의 최고봉 백화산(1,063.5m)으로 향한다. 이번구간의 유일한 1,000m대 산답게 흰 눈으로 치장했다.

정상에 올라서자 낮은 나뭇가지 위로 지나온 산들이 출석을 부르고 있다. 백학산, 윤지미산, 황악산, 속리산이 과감히 생략된 선으로 남아 있다. 지나온 산들도 사족은 모두 버리고 저리도 단순해지는 것을. 쓸데없는 미련은 왜 이리 복잡하게 스스로를 얽어매는지. 산이 왜 그리 사냐고 물어온다.

자연 능선에 조금 어울리지 않는 데크계단에 올라서자 하산 선물처럼 뻥 트인다. 짧게 머무르고 떠나는 자식에게 꾸역꾸역 농사지은 보따리를 들려 주는 시골집 꼬부랑 할매처럼, 마지막까지 경치를 챙겨 준다.

경치 없는 이만봉을 거쳐 분지리로 사다리처럼 가파른 골을 따라 쏜살같이 내려선다.

흐르지 않는 계곡, 사람 없는 능선, 미인의 눈썹 같은 산줄기, 폭발하는 심장 박동, 듬직한 산꾼들의 코고는 소리, 벌벌 떨며 먹던 주먹밥 같은 투박하고 단순한 시간들. 금방 그리워 견디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희양산 구간 종주 가이드

세다. 버리미기재에서 이화령까지 30km 대간줄기는 오르내림이 심하고, 바윗길도 잦은 편이라 거리보다 시간과 체력이 많이 소모된다.

구왕봉과 희양산은 가파르고 험하며, 백화산과 황악산은 상대적으로 완만해 수월한 편이다. 버리미기재에서 장성봉까지, 이어서 악휘봉까지는 비법정길이다. 쌍곡리의 시묘살이계곡 코스와 제수리재와 막장봉을 잇는 능선길이 합법적인 장성봉 산행 코스다. 13km로 긴 편이라 장성봉만 당일산행을 따로 해야 한다. 악휘봉 진입은 은티마을에서 입석골(마분봉 이정표)을 따라 가면 된다. 완만한 계곡이 길어 접근이 비교적 수월하다.

곳곳에 괴산 연풍 방면으로 내려서는 하산길이 있어 체력에 맞게 구간을 나눌 수 있다. 다만 은티재와 지름티재, 평전치 이외의 하산길은 급비탈이라 주의해야 한다. 중간 샘터는 확인된 곳이 없으므로 식수를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교통

버리미기재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 다만 문경 방면으로 3km 가면 대야산 용추계곡 입구의 벌바위 버스정류장에서 가은과 마성을 거쳐 문경 점촌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하루 3회 운행한다. 은티마을에서는 연풍으로 나가는 버스가 하루 3회 운행한다. 분지리에는 버스편이 없으며 분지리 입구의 진촌마을에서 하루 2회 연풍행 버스가 운행한다.

이화령은 터널이 지나는 신도로와 산행기점인 구도로가 있으며, 버스는 운행하지 않는다. 문의 연풍택시(043-833-1494, 833-5252, 833-8580), 문경 가은택시(054-571-6320, 571-6138).

숙식(지역번호 043)

버리미기재는 국립대야산자연휴양림(054-571-7181)이 가깝고, 이화령에서는 괴산군에서 운영하는 조령산자연휴양림(833-7994)이 가깝다. 인근 펜션에 비해 저렴하고 시설이 깨끗하다. 홈페이지에서 예약 가능하다.

은티마을에는 대간꾼들의 맛집과 뒤풀이 장소로 잘 알려진 주막집(832-0391)이 있다. 막걸리가 맛있다고 소문났으며 돼지두루치기, 닭볶음탕, 버섯찌개, 빈대떡 등의 식사와 안주거리가 있다.

민박도 가능하다. 이화령터널휴게소(신도로)와 이화령휴게소(구도로)에서 식사 가능하며, 연풍면사무소 소재지에 연풍해장국(833-7768), 돼지고기 전문 연풍양돈조합직판장(833-9922), 은성식당(833-577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