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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구간, 황장산 백두대간 에코트레일. 13

표지 : 황장산의 백미인 묏등바위 능선길. 첩첩산중으로 늘어선 대간 줄기를 미세먼지가 삼켜버렸으나, 산을 타는 즐거움까진 앗아가지 못했다.

글 신준범 기자 / 사진 주민욱 기자

굽은 소나무가 전하는 조선 왕실의 황장목 산 이야기

묵언의 산이었다. 숲은 바다 속처럼 고요했다. 평범한 산세지만 지극히 차분한 기류, 오랫동안 금단의 산으로 묶였던 여파가 남아 있었다. 잊혀진 왕실의 기품을 실은 바람은, 솔향기 머금은 채 흩날리며 ‘봉산封山’으로 대접받던 시절을 추억하고 있었다. 조선 왕실에서 사람의 출입을 금지했던 황장산이다.

예로부터 큰 키로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곧게 뻗은 소나무의 공식 품종은 금강소나무이며, 춘양목春陽木, 황장목黃腸木으로 불렸다. 조선 왕실에서는 벌채를 금하는 ‘황장봉산’을 지정해 관리했다. 왕실의 건축 재료로 황장목을 쓰기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했던 산인 것이다. 산 이름도 그렇게 유래했다.

생달리를 찾은 두 사람은, 블랙야크 새내기 셰르파인 김이슬씨와 본지에 ‘아트하이킹’을 연재하고 있는 벽화가 김강은씨다. 산山과 달月만 보이는 깊은 산골이라 하여 ‘산달’이라 불리던 것이 ‘생달’로 변했다고도 하며, 이곳 계곡에 떨어져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하여 ‘생달’이란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와인동굴 앞 주차장에서 배낭을 메고 스틱을 꺼낸다. 손길에서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안쪽 생달마을인 안생달의 고도가 595m, 고도 150m만 올리면 백두대간 주능선이다. 탄광이 세월이 흘러 와인동굴이 되었고, 탄광촌 주민들은 이제 대부분 오미자 농사를 짓는다.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세운 이정표를 따라 산에 든다. 기온은 한결 올랐으나 숲은 여전히 앙상하다. 멈춘 풍경 속엔 활기가 감돈다. 촐랑거리는 우만골의 물소리가 마중 나온다. 꼬리치며 뛰어나온 강아지처럼 명랑한 것이, 귀엽다.

묏등바위 사이로 난 데크길. 과거 고정로프를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지나던 곳이었으나, 문경시와 국립공원에서 안전하게 정비했다. 주민욱 기자가 드론으로 촬영했다.

완만한 산길을 따라 낙엽송숲이 펼쳐진다. 타협하지 않은 곧은 뜻을 긴 세월 동안 켜켜이 쌓아 올렸다. 허나 잎이 떨어진 빈 숲의 평온은 왠지 쓸쓸한 무늬를 띠고 있어, 봄을 기다리는 진득한 염원이 풍겨나는 것 같았다.

작은 차갓재에서 한 달 만에 백두대간 본줄기를 만난다. 푸근한 소 등 같은 쉬기 좋은 고개엔 벤치가 있으나, 이제 몸이 풀어진 터라 물 한 모금 마시고 곧장 종주에 나선다. 미세먼지 ‘매우 나쁨’을 알리는 날씨에도 백두대간은 맑은 샘물 같은 상쾌한 공기를 머금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간 능선에 있으면 안도감이 든다.

해일처럼 출렁거리는 고통스런 능선을 탄 지 1년이 되었고, 이젠 이 변덕스런 거대한 산줄기가 떠나기 싫은 겨울아침의 아랫목 같다.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능선에 실어 보낸다.

산행은 짧아도 경치는 짧지 않다. 오르막이 지루할 만하면 경치가 트이며 금단의 한을 풀어헤친다. 흘러내리는 지능선이 요동치며 솟구쳐 오르는 용마냥 기운 넘친다. 둘러보아도 황장목은 없다. 참나무가 온 산에 드리웠으며 남은 소나무도 굽은 것뿐이다.

문복대 정상에 오른 김이슬(왼쪽) 셰르파와 벽화가 김강은씨.

못생긴 소나무가 산을 지킨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하지 않던가. 쓸모없어 보이는 나무가 살아남아 산을 지켜왔다. 쓸모없음이 쓸모없지 아니했던 것이다. 똑똑한 사람들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함을 뜻하기도 한다. 못생긴 나무가 지키는 산에서 먼 곳을 바라보니, 미세먼지 희뿌옇게 가득 메워 산그리메도 삼켜버렸다.

고도를 높이자 도깨비 몽둥이 같은 능선의 바위가 가까워 온다. 과거에는 부실한 고정로프를 잡고 아슬아슬하게 지나는 위험구간이었으나, 문경시와 국립공원에서 산길을 정비하며 데크계단이 놓였다. 황장산이 월악산국립공원에 포함되면서 출입이 금지된 산이었으나 2016년 31년 만에 개방되었다.

황장산 정상만 다녀올 수 있는 짧은 코스지만 왕실의 황장봉산이며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산행할 수 있는 원점회귀 코스라 주말이면 많은 사람이 찾는다. 돌이켜보면 조선시대에도, 현대에 들어서도 황장산은 금단의 산이었다.

금지된 산을 누비는 쾌감이 절정에 이르는 곳은 산행의 백미인, 묏등바위. 동쪽으로 도락산과 황장산처럼 걸출한 바위산이 막강한 기운을 뽐내는 뷰포인트지만, 오늘은 미세먼지가 짙어 열린 개방감만 즐긴다. 데크가 있어 스릴은 없으나 와락 안겨오는 찬바람에서 1,000m대 능선의 힘을 실감한다.

큼직한 표지석이 있는 정상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덕분에 바람을 막아줘 배낭을 내려놓고 도시락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대간은 얼마 안 가 막힌다. 불법종주를 막기 위해 능선에 철망을 쳐 놓았다. 대간을 버리고 어리시골(배창골)로 내려선다. 급하게 고도를 내리는 계단길 덕분에 고도를 빠르게 낮추었다. 원시숲 특유의 어둑함이 감도는 숲이 어느 순간 확 트이더니, 오미자 밭이 너르게 펼쳐진 안생달이다. 숙소로 이동해 하루를 마무리한다.

황장산 하산길에 만난 돌탑에 소원을 담아본다.

파랑이 이토록 반가운 색깔이었나. 미세먼지를 헤치고 드러낸, 살짝 파란 하늘이 반갑기만 하다. 비법정 구간을 생략하고 벌재에 섰다. 벌재는 문경 동로면 적성리의 한자 표기가 붉을 ‘적赤’인데, 붉은 고개를 이곳 사람들이 ‘벌겋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해발 590m로 낮은 고개인 탓에 접근이 쉬워 일대의 나무를 땔감으로 벌목해 붉은 흙이 드러난 민둥산 줄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간꾼들의 표지기가 성황당마냥 주렁주렁 달린 계단을 올라서자 곧장 키다리 낙엽송숲이다. 침엽수임에도 잎이 진다고 하여 낙엽송, 일본이 원산지인 잎을 가는 나무라 하여 일본잎갈나무라 불린다. 레드카펫처럼 낙엽송의 붉은 솔잎이 바닥을 메워 발 디딤이 푹신하다. 연일 미세먼지 가득한 세상이지만, 숲에서의 호흡은 상쾌하다. 봄을 부르는 것 같은 아침의 산새 소리가 귀를 청소해 주는 것처럼 깨끗하다.

걸을수록 몸의 감각이 맑아진다. 발의 푹신한 촉감이 시골집 할머니 손길처럼 여운이 깊다. 백두대간을 가고 있을 뿐인데, 마음의 위로가 된다. 내가 산을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산이 사람 속을 들여다보고선 “다 괜찮다”며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봉우리다운 맛이 없는 828m봉을 지나자 낙타 등처럼 고도를 뚝 떨어뜨린 뒤, 다시 오름길. 능선 왼쪽은 낙엽송, 오른쪽은 잣나무가 빼곡하다. 사람이 심은 전형적인 인공숲이다. 가운데 능선엔 처절할 정도로 억척스런 떡갈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벌재에서 문복대 방향으로 산에 들면, 키다리 낙엽송숲이 펼쳐진다.

복을 주는 문, 문복대

정상 직전의 위성봉인 1020m봉이 가까워오자 간간이 바위도 드러난다. 경치가 귀한 탓에 조금이라도 시야가 트인 곳에선 사진을 실컷 찍어둔다. 맑지만 맑지 않은 미세먼지 자욱한 산경에 아쉬움 가져봤자 소용없음을 안다.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 산이 없는 것이 아님을, 산꾼들은 우직한 걸음으로 알고 있다. 지나온 산줄기는 희뿌연 하늘 속으로 떠나보내고, 추억은 마음에 담아둔다.

복을 불러오는 문,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문복대門福臺 정상에 소박한 표지석이 있다. 작은 바위 더미가 있으나 나무가 높아 경치는 어림없다. 복을 기원하듯 정상 인증사진을 찍고 능선의 물결에 다시 몸을 싣는다. 앙상한 가지는 ‘봄은 아직 멀었다’며 엄포를 놓는 듯하지만 김이슬·김강은씨의 환한 미소에서 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멀리 저수령과 다음 구간인 촛대봉이 보인다. 마음이 저만치 앞서가며 얼른 하산하자고 보챈다. 산행의 마무리는 다시 낙엽송이다. 임도가 지나는 고개에서 정갈한 숲이 인사를 전한다.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저수령에는 큼직한 표지석과 폐업한 지 몇 년은 된 것 같은 주유소가 고개를 지키고 있다. 다시 백두대간을 떠난다. 힘을 쓰고 가는 것이 아니라 힘을 얻고 간다.

쓰러진 나무는 곤충의 집이 되고, 사람들의 벤치가 되기도 한다. 올해 새로 발탁된 김이슬 블랙야크 바이크 셰르파(우측)와 벽화가 김강은씨.

황장산 구간 종주 가이드

대미산 구간이 비법정으로 묶여 있어 합법적인 산행은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 황장산에서 가능하다. 황장산은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안생달~작은 차갓재~정상~안생달을 잇는 원점회귀 산행만 가능하다. 산행 거리는 5.5㎞이며 어리시골(배창골)에서 안생달로 이어진 내리막길을 제외하면 완만한 편이라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황장산에서 벌재로 이어진 대간길 역시 비법정으로 묶여 있다. 벌재에서 문복대 지나 저수령까지 7.5㎞이며 오르내림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푹신한 흙산이라 어렵지 않다. 능선이 뚜렷해 길찾기도 수월한 편이다.

교통

문경 점촌버스터미널에서 안생달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 5회(06:00~15:10) 운행. 문경읍내에서 안생달행 버스는 하루 2회 운행. 벌재는 문경보다 단양에서 접근하기 더 쉽다. 단양읍내에서 방곡행 버스를 타고 회차지점인 오목내에서 하차하면 된다. 하루 10회(06:15~19:05) 운행한다.

오목내에서 도로따라 2㎞ 도보로 이동하면 벌재에 닿는다. 문경 동로면에서 벌재를 거쳐 오목내로 가는 버스가 있으나 하루에 단 2회(08:25, 16:50)만 운행한다. 저수령에는 운행하는 버스가 없다. 단양 방면으로 2㎞ 걸으면 올산리에 단양 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하루 5회 운행한다.

숙식(지역번호 043)

벌재와 저수령 인근에는 숙소가 적은 편이다. 국립황정산자연휴양림(421-0608)과 단양에서 운영하는 소선암자연휴양림(422-7839)이 비교적 가깝고 가성비 높은 대형 숙소다. 벌재에서 비교적 가까운 방곡토속식당(422-3636)은 닭도리탕과 백숙, 산채비빔밥 전문.

황장산 입구에는 산모롱이펜션(054-553-9267), 문경새재황토펜션(054-553-5790) 등이 있다. 식당은 문경 동로면이나 단양 단성면읍내에 많다.